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 출발해 평창올림픽과 두 차례에 걸친 남북회담, 북미회담으로 이어진 한반도 평화를 향한 대장정이 거친 풍랑 속에서도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스트레이트뉴스는 70여 년 간 허리 잘린 DMZ(비무장지대)를 머리에 이고 살아온 최북단 접경지를 탐방, 남북 공동 번영과 평화를 염원하는 현지 목소리를 전하는 르포르타주를 기획했다. 철도 상행선이 멈춘 제진역(강원 고성 현내면)과 백마고지역(강원 철원 대마리), 도라산역(파주 장단면) 등 세 곳과 인근지역, 2010년 11월에 포격을 당한 연평도(인천 옹진 연평면) 등지를 둘러봤다. 이번 르포는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주>
[목차]
① 동해: 금강산 관문에 부는 변화의 바람
② 동해: 제진항, 남북경협의 전진기지 될까?
③ 동해: 김일성의 고려연방제와 2018년의 한반도 정세
④ 내륙: 철원의 백마는 달리고 싶다
⑤ 내륙: 한탄강과 임진강의 합수머리
⑥ 서해: ‘눈물의 섬’ 연평도에 부는 평화의 바람
서울역에서 출발해 의정부와 양주, 동두천, 연천을 통과한 기차는 강원도 철원평야의 북쪽 끝에 위치한 백마고지역에 정차한다. 원산으로 향하는 경원선 열차다. 그러나 열차는 더 이상 갈 수 없다. 철길이 끊겨서다.
내리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역 주차장에 차량 몇 대만 주차되어 있을 뿐, 궂은 날씨 탓인지 인적을 찾을 수 없어 역사 전체가 을씨년스러웠다.
약 500미터쯤 떨어진 논에서 비옷을 입고 작업 중인 농부 윤모(80)씨를 만났다. 2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 이후 동네에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그런 거 없어. 군무원들캉 군바리(군인)만 댕기는데 무슨 뭐가 있겠어? 기차는 동네 사람들이 연천 댕기러 갈 때 허고 갸들(군무원, 군인) 출퇴근 헐 때 잘 타고 댕기지요 뭐. 요새는 다들 차 갖고 댕기잖어. 기차가 길이도 짧어. 달랑 세 개밖에 없으니까.”
대마리 마을 입구에 산다는 농부는 이왕 온 걸음이니 ‘별로 볼 것은 없지만’ 노동당사와 백마고지나 둘러보고 가기를 권했다.
노동당사는 해방 이후에 지어져 6・25한국전쟁 직전까지 사용된 북한 노동당 철원 당사를 말한다. 당시 이곳은 3만 명이 사는 철원읍 시가지였지만, 반파된 당사 건물 외에 모든 것이 철저히 파괴됐다. 2015년 기준 철원읍 인구가 5,000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철원이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동당사로 향하는 동안 한국전쟁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로변이 온통 접근이 통제된 지뢰밭이어서다.
“예전에는 여기도 민통선 안쪽이었답니다. 관광객들이 오기는 하지만, 남북회담 영향은 별로, 그렇게 표 나게 늘어난 거 같지는 않은데요. 요 아래 동네가 대마리인데요, 그 동네도 조용하고, 여기는요 정말로 조용해요.”
노동당사 왼편 검문소 근처에서 만난 어느 군무원의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검문소와 노동당사 사이 도로변에 오래된 남북회담 환영 현수막 하나가 달랑 걸려 있을 뿐, 오는 길에 평화 분위기를 감지할 만한 징후는 없었다.
노동당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백마고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중공군 2개 사단과 국군 1개 사단이 맞붙었던 곳이다. 당시 전투가 열흘이나 계속됐는데, 양측이 24번이나 뺏고 빼앗긴 끝에 국군이 가까스로 지켜낸 지역이다. 30만 발에 달하는 포탄 세례 탓에 고지의 모습이 옆으로 드러누운 백마처럼 변했다 하여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마고지에서도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연무가 밀려드는 고지 입구, 드러누웠던 백마가 벌떡 일어나 마치 달리고 싶다는 듯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동상과 인터뷰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랫녘으로 핸들을 돌렸다.
연곡으로 방향을 잡고 인적 없는 신탄리역을 지나 몇 구비 돌아가자 대광리역이 나타났다. 백마고지역이나 신탄리역과 달리 역전 사거리에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다들 나이가 많아서 90% 이상이 자유한국당입니다. 남북회담이고 북미회담이고 간에 전국 이슈는 안 먹혀듭니다. 지역 이슈를 최고로 치죠.”
지역 이슈에 대해 물었다.
“여기는 연천군인데요, 김규배, 김규선 형제가 번갈아가면서 무려 16년이나 군수를 해먹었어요. 요번에 김규선이 또 나왔다가 경선에서 떨어졌지 아마? 고대산에 스키장 만든다고 설쳐대더니 그게 무산이 됐어요. 그게 됐으면 좀 발전할 수 있었을 건데 말이야. 베이스볼파크라고 만들어놨지만, 그거 뭐 어디다 써먹어.”
역전 사거리에서 부동산업체를 운영하는 김모(56)씨의 설명이다. 역 앞에서 군용물품 가게를 운영한다는 진모(48)씨도 거들었다.
“대대 하나가 연천 전곡 쪽으로 빠진 것도 이 동네사람들 불만입니다. 다른 곳도 대대가 줄기는 했지만, 문제가 뭐냐 하면요, 장교랑 하사관 숙소까지 옮겨가서 사람이 줄었다는 거거든요.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그나마 있던 군인들까지 나가는 형편이니, 동네가 갈수록 쪼그라들죠.”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동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땅값에는 영향이 있는지 물었다.
“파주 쪽이랑 고성 쪽은 난리도 아니라던데, 여긴 뜸해요. 제 생각에는 경원선 발표가 안 나서 그런 거 같습니다. 저번에 도라산역에서 올라가고 제진역에서도 올라가는 거, 발표 났잖아요. 땅값요? 그래도 그전까지 나와 있던 매물은 주인들이 일단 거둬들인 상탭니다. 남북회담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동네는 역 사거리 근처가 다예요. 20집 정도가 장사를 하는데, 평당 50만 원 보시면 됩니다. 도로가라도 요 앞 사거리만 벗어나면 18만 원 하고... 대충 그래요.”
대광리를 빠져나와 신망리로 향하는 길에 대형 현수막이 보였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연천군협의회가 설치한 남북정상회담 환영 현수막이었다. 와초삼거리 슈퍼 처마 밑에서 주민 이모(85)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난 누가 뭐라 그래도 홍준표여. 문재인은 퍼주기만 하는 당이잖어. 여기는 다들 한나라, 아녀 어디여, 거기 자유한국당이여.”
“김정은이가 미국 트럼프 만나는 거는, 지들끼리 쇼하고 만나는 거지, 그것이 우리 통일하고 뭔 상관이여? 전쟁 끝났다는 거, 그게 해주면 안 돼. 북한에 핵폭탄이 수백 개라는데, 미국꺼정 날라가는 미사일 두어 개 말고는 그대로 둔다잖여. 증거가 그렇게 딱 있는데 말이여, 풀랑카드 저런 거 백날 붙여야 필요 없어.”
북미정상회담이 소형 핵탄두는 그대로 두고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몇 개 없애는 것으로 정리될 거라는 예상이었다. 조금 더 확장해 해석해 보면, 완전한 비핵화, 즉 CVID가 선행되지 않는 한, 남북회담이나 북미회담, 종전협정 모두 위장평화쇼라는 자유한국당의 입장과 똑같았다. 과연 자유한국당의 텃밭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신망리역,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백마고지역이나 신탄리역, 대광리역 인근 주민들과 사뭇 달랐다. 신망리 주민 양모(49)씨를 만났다.
“민심이나 뭐나 신망리는 연천도 아니고 철원도 아니고, 딱 중간이라고 보면 돼요. 대광리 쪽은 어떻던가요? 좀 갑갑하죠? 온통 군바리(군인) 천지라서 그래요. 군바리들 덕에 먹고 사는데, 군바리 없어지면 해먹고 살 게 없잖아요. 연천은 달라서 북미회담 기대 많죠. 전에 김정은이가 내려왔을 때는 잘 안 믿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주변에 이렇게 얘기 들어보면 경원선도 연결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거든요.”
정치에 대한 민심은 어떤지 물었다.
“어이구, 확 변했죠. 한나라당 새누리당 할 것 없이 보수 깃발만 들었다 하면 무조건 당선되던 곳 아니요 여기가. 세상이 바뀌었다니까요. 민주당에서는 왕규식이가 나왔고, 한국당에서는 김광철이가 나왔는데, 군수 선거에요, 김광철이 무지 어려운 모양이더라고요. 뻑하면 미사일을 쏘네 마네 겁만 주고, 지역에 해놓은 건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좀 바뀔 만도 하죠.”
그의 말은 실제 여론조사 결과와 다르지 않았다. 한국리서치(강원일보 외 4개사 의뢰)가 지난달 28, 29일 양일간 철원, 연천, 화천, 양구 등 접경지 민심을 조사한 결과, 모든 지역에서 민주당이 한국당에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내륙의 DMZ(비무장지대) 접경지인 철원과 연천의 민심 역시 동해안 접경지인 고성군의 민심처럼 민통선에서 멀어질수록 보수의 색채가 엷어지다 어느 지점에서 보수와 진보가 역전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남북한 정상이 이미 두 차례나 만났고,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열강들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6월 12일에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거의 70년 가까이 ‘안보’라는 이름의 짙은 연무에 가려져 있던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비치고 있다. DMZ 민심 또한 안보와 두려움에서 평화와 기대로 변해가고 있다.
취재를 마칠 즈음, 철도 중단점인 백마고지역을 향해 신망리역을 떠났던 열차가 어둠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정차한 차량 안을 살펴보니 군인들뿐이었다. 달랑 3량뿐인 열차가 10량, 20량으로 늘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현재 북한이 개발 중인 원산 관광단지를 다녀오는 남한 관광객으로 북적일 수 있을까? 또 관광열차 사이사이에 컨테이너를 잔뜩 적재한 화물열차가 배치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언제쯤이나 실현될 수 있을까? 북미정상회담에서 제시될 비핵화 로드맵, 그리고 남북 당국자간 협의 결과들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김태현 bizli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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