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고금리·고물가, 전쟁 장기화 등으로 인한 경기 침체의 여파로 위기에 처했다. 본지는 창간 12주년을 맞아 생존의 기로에 놓인 주요 기업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는 한편,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사업 발굴과 기존 사업 보완 등 다양한 해결방안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테네시주의 얼티엄셀즈 제2공장에서 현지 직원들이 배터리 생산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제공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테네시주의 얼티엄셀즈 제2공장에서 현지 직원들이 배터리 생산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제공

국내 배터리 업계가 올해 들어 전기차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정체)으로 실적이 주춤하면서 위기 타개에 힘쓰고 있다. 

캐즘 현상의 여파가 예상보다 큰 가운데 기업들은 ESS(에너지저장장치) 등 다른 분야에 주력하는 한편, 향후 시장 주도권을 위해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해 1분기에는 전기차 캐즘으로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배터리 3사의 실적이 크게 하락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1분기에 연결기준 매출 6조1287억원, 영업이익 1573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9.9%, 영업이익은 75.2% 줄어들었다. SK온도 매출 1조6836억원, 영업손실 3315억원에 그쳤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49% 감소했고 영업손실 폭은 전분기 대비 3000억원 이상 확대된 규모다.

두 회사보다는 선방했지만 삼성SDI도 전기차 캐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분기 매출 5조1309억원, 영업이익 2674억원을 기록했는데,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2%, 28.8% 감소했다.

김호섭 한국신용평가 연구위원은 배터리 업종 부진에 대해 ▲경기침체에 따른 고가 내구재 소비심리 위축 ▲여전히 고가인 전기차 가격 및 충전 인프라 부족 ▲각 국가의 보조금 축소 및 친환경 정책 지연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전동화 시대 과도기 과정에서 전기차 수요가 둔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배터리 3사는 새로운 돌파구 마련에 나서고 있으며, 그 가운데 에너지저장장치(ESS)에 힘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ESS는 전 세계적으로 탈탄소 기조가 가속화하면서 신재생에너지의 수요도 함께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주목받고 있는 분야다. 이에 전기차 캐즘 현상에 따른 위기를 극복할 '우회 전략'으로 낙점한 것이다.

신재생에너지는 날씨나 계절에 따라 출력양이 들쑥날쑥한데 이를 ESS가 보완할 수 있다. ESS는 전력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장치이므로 신재생에너지 저장이 용이한 게 특징이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ESS 시장 규모는 지난해 대비 27% 증가한 400억 달러(54조9000억원)로 증가할 전망이다.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2035년에는 800억 달러(109조8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배터리 3사는 기존에 주력이었던 고가의 삼원계(NCM·NCA 등) 배터리 비중을 낮추고 LFP(리튬인산철) 등 저가 배터리 생산·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ESS 시장에서는 화재 위험성이 낮은 LFP 배터리가 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ESS용 LFP 배터리 개발은 3사 중 LG에너지솔루션이 가장 먼저 완료했다. 지난해 12월 ESS용 LFP 배터리 개발을 마치고 양산을 시작한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한화큐셀 미국법인과 4.8GWh 규모 ESS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는 LG에너지솔루션이 그동안 진행했던 ESS 프로젝트 중 최대 규모다.

또 지난해 말부터는 중국 난징 공장 라인 일부를 ESS LFP용으로 전환하고 내년 하반기에 LFP 롱셀 배터리 양산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삼성SDI의 전고체 배터리 모형. 삼성SDI 제공
삼성SDI의 전고체 배터리 모형. 삼성SDI 제공

삼성SDI는 지난해 말 ESS 배터리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2026년 양산을 목표로 LFP 배터리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전기차용 LFP 배터리 양산보다 ESS용부터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SK온도 2026년 LFP ESS 시장 진출을 검토하는 중으로, 미국에 ESS용 LFP 배터리 공장을 설립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배터리 3사는 캐즘 현상 속에서도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투자 역시 지속한다는 방침이다. 현재로서는 수요가 정체되고 있어 성장세가 둔화된 상태지만, 전동화 시대는 필연적인데 따라 향후 미래를 대비해 미리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정원석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세계 각국의 친환경 정책 방향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수요 둔화 가능성이 존재하더라도 자동차 산업의 전동화 기조는 분명하다"며 "차량의 전동화가 스마트카 구현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점도 전기차 수요 방향성을 의심하지 않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양산 시기 앞당기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전고체 배터리는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이온을 전달하는 역할인 '전해질'이 고체인 차세대 배터리다. 기존에 전해질인 액체인 리튬이온 배터리 등과 비교해 화재 위험성이 낮고 무게도 가벼운데다 완충 후 사용시간도 길어 성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고체 배터리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2년 2750만 달러에서 2030년 400억 달러 규모로 가파르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3사 중에서는 삼성SDI의 양산 시기가 가장 빠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삼성SDI는 지난해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라인 구축을 마쳤으며 2027년을 양산 목표로 하고 있다. 최윤호 삼성SDI 사장은 "전고체 전지는 계획대로 2027년 양산을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은 양산 시기를 각각 2028년과 2030년 정도로 보고 있다. SK온은 2026년 초기 단계의 전고체 배터리 시제품을 생산하고 2028년 상용화한다는 목표며 LG에너지솔루션은 고분자계와 황화물계 두 가지 종류의 전고체 배터리를 양산할 계획인 가운데 2026년에는 고분자계를, 2030년에는 황화물계를 양산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전고체 배터리는 일본과 중국에서 개발에 속도내고 있는 만큼 국내 기업들의 시장 우위 선점이 중요한 분야다. 상용화를 위한 비용 문제도 있지만 기술력 확보가 가장 어려운 만큼 개발을 해내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해 양산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관건이다.

앞서 전기차용 LFP 배터리의 경우 경제성이 낮다고 판단해 국내 배터리사들이 개발을 외면했다가 고가 전기차의 대중화 작업에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중국에 시장 주도권을 뺏긴 바 있다. 이에 전고체 배터리 만큼은 시장 우위를 선점하겠다는 배터리 3사의 의지가 강한 상황이다.

이밖에도 배터리 3사는 중국을 견제 중인 북미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캐즘 탈출을 꾀하고 있다. 북미 시장은 캐즘 영향 속에서도 전기차 수요가 다소 견고한 편이다. 현대자동차·기아 역시 북미 시장 전기차 판매가 성장폭은 좁아도 꾸준히 늘고 있으며, 시장조사기관 EV볼륨스도 올해 미국 전기차 수요가 전년 대비 70%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북미는 중국산 배터리 및 소재에 대해 강하게 장벽을 세우면서 국내 기업들이 진출하기 유리한 구조다. 캐즘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북미 시장에 기대를 하게 되는 이유다.

이에 따라 배터리 3사는 약 50조원 가량을 투자해 2027년까지 북미 지역에 연 644GWh 수준의 배터리 생산능력을 갖추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이는 한 해 동안 전기차 1000만대 가까이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업계에서는 배터리 업황 회복세를 살피며 반등의 시기가 앞당겨질지 주모하하고 있다. 이용욱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전기차 업황은 2분기를 바닥으로 3분기부터는 판매량 증가와 국내 국내 업체들의 수익성 회복이 기대된다"며 "보조금 등의 정책 수혜보다는 전기차 본연의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시장 성장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스트레이트뉴스 함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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