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축소·세대교체·미국대응·신사업 강화' 기조 뚜렷
승진 줄고 신규 임원 늘어.. 부회장단 유임 '안정' 꾀해
젊은피 수혈·미래 경쟁력 확보·트럼프 대비 인사로 '쇄신'
세계적 경기 침체로 비상경영을 펼치고 있는 대기업들이 국내로는 비상계엄 사태, 해외로는 내년 트럼프 정부 재출범을 향한 대비책 마련에 분주해지고 있다.
올해보다 내년에 경영환경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삼성, SK, 현대차, LG 등 4대 그룹을 비롯한 대기업들은 예년보다 한 달여 이른 정기 인사를 통해 조직 슬림화에 따른 경영 효율화를 꾀하고 미국 대응과 신사업 발굴에 집중하겠다는 포석을 내놨다.
5일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열어 각 계열사 이사회를 통해 결정된 임원인사와 조직개편 사항을 공유·협의해 발표했다. 4대 그룹 중 가장 마지막에 인사를 실시한 SK 역시 큰 변화보다는 '안정', 미래 사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역량 키우기에 방점을 둔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올해 4대 그룹 모두 승진 규모는 전년 대비 축소됐다. 임원 수는 줄었고 주요 부회장단 등 핵심 인물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대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기술력, 신사업 부문 등에는 젊은 인재들을 배치해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또 미국 대응에서 역량을 발휘할 인력도 배치했다. 중국의 저가 공세, 미국 트럼프 정부의 재집권 등으로 점점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시장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이번 정기 임원인사에서 전년보다 6명 줄어든 137명의 승진자를 발표했으며 부회장 3인(정현호·전영현·한종희) 체제를 이어가기로 했다. 임원 승진 규모가 140명 아래로 줄어든 건 국정농단 사태가 있던 2017년 5월(96명) 이후 7년 만이다.
LG그룹도 올해 정기 임원인사 승진자는 총 121명으로, 전년(139명) 대비 18명이 줄었다. 이 역시 최근 3년 내 최소 규모다. 또 새로운 부회장 선출 없이 부회장단 2인 체제를 유지하기로 했다.
SK그룹도 임원 규모를 축소했다. 이번 정기 임원인사에서는 75명의 신규 임원을 배출했는데, ▲2022년 164명 ▲2023년 145명 ▲2024년 82명을 배출한 것과 비교하면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컨트롤타워격인 수펙스추구협의회의 소수 정예 기조는 그대로 이어간다.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승진 규모를 줄이고 임원 수도 축소하면서 기존 경영 구조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파악된다. 대신 대기업들은 필요한 부분에는 '젊은 피' 수혈 등 세대교체를 단행해 쇄신을 꾀했다.
LG그룹은 올해도 80년대생 임원을 배출했다. 이들 모두 그룹의 새 먹거리인 AI(인공지능) 분야에서 글로벌 수준의 연구 역량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로, 향후 그룹의 AI 핵심 과제를 추진하며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40대 직원 8명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중 최연소 임원 승진자인 하지훈(39) DX부문 CTO SR 통신S/W연구팀 상무는 차세대 통신 소프트웨어 플랫폼 설계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롯데그룹은 젊은 내부 인재를 적극적으로 중용하기로 했다. 롯데면세점, 롯데케미칼 등 주요 계열사들 총 12자리에 1970년대생 신임 CEO를 대거 내정해 그룹의 쇄신에 나섰다.
미국 대응을 위한 조치도 두드러졌다. 현대차그룹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현대차에 외국인 CEO(최고경영자)를 선임하는 등 파격 인사를 실시했다. 미국 트럼프 정부 재집권에 따른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대외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그간 현대차 북미권역본부장 겸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직책을 맡았던 호세 무뇨스 사장을 현대차 CEO로 선임했으며, 주한 미국대사 등을 역임한 성 김 고문역을 그룹 싱크탱크 사장에 임명했다.
반도체 파운드리사업에서 다소 난항을 겪고 있는 삼성전자는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파운드리사업부 수장 자리에 그간 DS부문 미주지역을 총괄하던 한진만 DSA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켜 자리하도록 했다. 탄탄한 미국 네트워크를 통해 수주를 확대하겠다는 포석이다.
SK그룹은 북미 대외 업무 컨트롤타워로 신설된 SK아메리카스 대관 총괄 자리에 폴 딜레이니 부사장을 선임했다. 폴 딜레이니 부사장은 미 무역대표부(USTR) 비서실장, 미 상원 재무위원회 국제무역고문 등을 역임하다 지난 7월 SK아메리카스에 합류한 인물로, 이번 인사를 통해 그룹 북미 대관 총괄로 역할을 확대하게 됐다.
신사업 추진과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인사도 실시했다. 특히 어려운 경영환경 속 수익성 확보가 가장 중요해지면서 부진을 겪는 계열사에 '재무통'을 선임해 불황 속 곳간 관리를 맡기는 한편 시장 입지를 다져야하는 곳에는 '기술통'을 여러 선임해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LG그룹은 기존 임원 승진 규모는 줄였으나 R&D(연구개발)에는 집중 지원하면서 임원 수를 역대 최대인 218명으로 늘렸다. 신사업으로 추진 중인 ABC(AI·바이오·클린테크)를 이끌 기술진 임원을 대거 발탁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최고재무책임자(CFO) 자리에 박순철 디바이스경험(DX)부문 경영지원실 지원팀장(부사장)을 선임했다. 박 부사장은 미래전략실 출신으로, 네트워크 사업부, MX(모바일경험)사업부 지원팀, 사업지원TF(태스크포스) 등을 거쳐온 경력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삼성전자의 매출과 이익을 비롯해 신사업 등 투자, 자금 계획 등 전사적인 재무를 관리할 전망이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사업부 내 CTO(총기술책임자) 보직을 신설해 '투트랙'으로 파운드리 사업을 이끈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 신임 CTO 자리에는 DS부문 글로벌제조&인프라총괄 제조&기술담당을 맡았던 남석우 사장을 선임했다.
현대차그룹은 그룹 내에서도 건설 계열사인 현대엔지니어링이 경기악화로 큰 고전을 겪고 있자 그룹 내 재무통으로 꼽히는 주우정 기아 재경본부장(부사장)을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다.
SK그룹은 미국 에너지부(DOE) 산하 연구기관에서 기후변화, 신재생 에너지 등 관련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김필석 박사를 SK이노베이션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환경과학기술원장으로 영입했다. 김 CTO는 2020년부터 최근까지 미국 에너지부의 40여 개 프로젝트를 주도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경쟁력 강화에 나설 계획이다.
또 피승호 SK실트론 제조/개발본부장을 SK온의 제조총괄로 선임했다. 피승호 총괄은 앞서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 R&D(연구개발) 실장 등을 담당하며 해외에 의존하던 기능성 웨이퍼의 자체 개발을 주도해 소재부품의 국산화를 이끌었던 '기술통'으로, 치열해지는 배터리 시장에서의 SK온 경쟁력 확대를 담당하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내년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4대그룹도 큰 변화는 주지 못한 모습"이라며 "예년보다 인사 시기도 비교적 빨라진 가운데 전반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인사가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스트레이트뉴스 함영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