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로 출발해 평창올림픽과 두 차례에 걸친 남북회담, 북미회담으로 이어진 한반도 평화를 향한 대장정이 거친 풍랑 속에서도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다. 스트레이트뉴스는 70여 년 간 허리 잘린 DMZ(비무장지대)를 머리에 이고 살아온 최북단 접경지를 탐방, 남북 공동 번영과 평화를 염원하는 현지 목소리를 전하는 르포르타주를 기획했다. 철도 상행선이 멈춘 제진역(강원 고성 현내면)과 백마고지역(강원 철원 대마리), 도라산역(파주 장단면) 등 세 곳과 인근지역, 2010년 11월에 포격을 당한 연평도(인천 옹진 연평면) 등지를 둘러본다. 이번 르포는 6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주>

[목차]
① 동해: 금강산 관문에 부는 변화의 바람
② 동해: 제진항, 남북경협의 전진기지 될까?
③ 동해: 김일성의 고려연방제와 2018년의 한반도 정세
④ 내륙: 철원의 백마는 달리고 싶다
⑤ 내륙: 한탄강과 임진강의 합수머리
⑥ 서해: ‘눈물의 섬’ 연평도에 부는 평화의 바람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옛 길은 구)민통선(민간인 출입 통제선) 검문소에서 끊겨 있었다. 제진검문소로 가기 위해 명파해변을 지나다가 해변 친수공간 공사장에서 휴식 중인 인부 몇 명을 만났다.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 대해 물었다.

“뉴스 보니까 북한에 김영철이 허고 미국에 그 누구냐, 폼... 폼... 암튼 폼씨 허고 얘기가 잘 되고 있는 거 같던데?”

“잘 될 거여. 김정은이가 세상으로 나올라는 거는 백프로(100%)고. 그렇잖어, 핵 갖고 있으면 뭐, 삶아먹기라도 할 거여? 이참에 종전협정인가? 맞나? 그거 하면 얼마나 좋아. 저기 좀 보쇼, 저렇게 멋들어진 해변에 철조망이 뭐냐고. 개구멍 하나 뚫어 놓고 글로(그리로) 들락거리라 그러고 말이야."

명파해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최근 개통된 명파천 인도교 ⓒ스트레이트뉴스
명파해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최근 개통된 명파천 인도교 ⓒ스트레이트뉴스

 “맞다. 간첩이 미쳤다고 절로 기어들어오나? 시절이 어떤 시절인데... 오모(오면) 또 뭐 할 낀데? 옛날에 리철진 동무가 내리와가꼬(내려와서) 뭐 하대? 돼지 새끼 갖고 갈라켔다(가려고 했다) 아이가. 하하하! 필요한 기 있으모(있으면) 인공위성 딱 움직이가꼬(움직여서) 보모(보면) 되는데. 아이모(아니면) 휴대폰으로 보든가. 북한에 휴대폰 400만 대나 있다 카잖아(그러잖아). 젊은 아들만(애들만) 총 들고 지킨다고 저래 개고생아이가(개고생이지).”

다섯 명 모두 50대 중후반에서 6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중 세 명은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수라고 밝혔지만, 북미정상회담이나 향후 남북관계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문 대통령의 최근 행보와 지방선거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동해와 맞닿은 명파천 하구와 해변을 따라 설치된 철조망 ⓒ스트레이트뉴스
동해와 맞닿은 명파천 하구와 해변을 따라 설치된 철조망 ⓒ스트레이트뉴스

인부들과 헤어져 4차선 도로로 올라섰다. 얼마 가지 않아 새로 생긴 제진검문소가 나왔다. 헌병이 다가왔다.

“충성! 출입신고서는 잘 보일 수 있도록 차량 앞쪽에 두십시오. 민통선 내 속도는 시속 30km 이하로 유지하시고, 앞차 추월은 금지됩니다. 정차 없이 전망대 주차장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트렁크 열어주십시오.”

제진역 사거리, 금강산까지 27km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지만, 수많은 관광버스가 지나다녔을 ‘동해선도로 남측 관문’은 바리케이드로 겹겹이 폐쇄되어 있었다. 좌측의 제진역 여객 게이트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제진역 입구에 정차하자 역 관리요원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차량 검문 중인 제진검문소 근무 헌병들 ⓒ스트레이트뉴스
차량 검문 중인 제진검문소 근무 헌병들 ⓒ스트레이트뉴스

취재 목적임을 밝히고 제진역의 최근 상황과 남북관계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역은 폐쇄된 후로 변동 없이 관리만 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요? 글쎄, 제 생각에는 잘 될 거 같은데, 모르죠. 자, 출발하십시오. 민통선 내부는 정차 금지입니다. 맞은편 구 도로로 진입하시면 됩니다.”

제진역 사거리에서 온정 방향으로 직진하면 동해선도로 남측 출입사무소가 나온다. 금강산 관광이 한창일 당시, 관광객으로 북적였던 곳이다. 하지만 역시 폐쇄되어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검문소에서 1km가량 떨어진 터널 입구에 설치된 도로 봉쇄용 콘크리트 구조물 ⓒ스트레이트뉴스
검문소에서 1km가량 떨어진 터널 입구에 설치된 도로 봉쇄용 콘크리트 구조물 ⓒ스트레이트뉴스

3km 정도를 기어가듯 달려서 도착한 통일전망대 주차장, 평일임에도 관광객들의 차량으로 빼곡했다. 서울에서 데이트 왔다는 이춘영(27)씨, 남자인(26)씨와 대화를 나눴다.

“경포대, 정동진, 금진해변 같이 데이트 할 곳이 많은데 여기 온 이유가 있습니까?”

“요즘 TV만 켜면 김정은, 볼턴, 폼페오, 싱가폴 그러잖습니까. 이왕이면 데이트도 시대에 맞게 해보자 싶어서요. 농담이구요, 사실 나중에 정동진 갈 겁니다. 근데 저희는요, 나이 많은 분들보다 크게 느낌은 없어요. 통일하는 데 돈 많이 든다는 얘기도 좀 걱정되고요.”

“자기야, 돈 많이 들면 통일 안 하고 왔다갔다만 하면 되잖아.”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에 의하면, ‘통일비용’은 독일의 흡수통일 사례를 근거로 한반도 통일에 소요되는 비용을 산출한 것이며, 일본에서 최초로 사용된 용어다. 20대 중반의 청년들이 통일비용을 걱정하는 배경에 정치인들의 ‘오래된 안보팔이 전략’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육로와 철로가 모두 막힌 제진역 사거리 ⓒ스트레이트뉴스
육로와 철로가 모두 막힌 제진역 사거리 ⓒ스트레이트뉴스

전망대로 오르는 길, 산 정상에 자리 잡은 낮은 전망대 옆으로 큼지막한 건물이 보였다. 고성군 접경개발기획단이 68억8천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새로 건설 중인 30m 높이의 전망타워였다. 시공을 맡은 더파크종합건설(주)의 공사 관계자 정관섭(가명, 49)씨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이 건물은 3층인데요, 3층은 전망대, 1층은 관광카페, 2층은 홍보관 하고 휴게시설이 될 겁니다. 2015년에 공사 시작했고요, 원래는 2017년 초 완공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좀 늦어졌어요. 올해 안에 되지 싶습니다. 3층 전망대에서 보면요, 경치 정말 끝내줍니다.”

“북한이 저렇게 체제보장을 원하는데 통일 되겠습니까? 저는 굳이 통일하는 거보다 우리는 우리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살면서 왕래나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가서 공사 좀 많이 하게요. 허헛... 옛날에 우리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보면 김일성이 고려연방제 나왔잖아요. 지금 돌아가는 거 보면 딱 그거 아닙니까? 지금이니까 이러지 그때 고려연방제 떠들었다가는 어디로 끌려가서 박살이 났겠지만...”

출입이 통제된 제진역 역사 ⓒ스트레이트뉴스
출입이 통제된 제진역 역사 ⓒ스트레이트뉴스

불쑥 튀어나온 고려연방제라는 말에 몸이 본능처럼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2018년 현재 남북관계를 그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방식도 없는 것 같았다. 자료를 뒤질수록 더 그래보였다.

고려연방제(Koryo Confederal System)는 1960년 북한 김일성 주석의 ‘8・15해방 15주년 경축대회 연설’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통일방안이다. 요지는 남북한의 정치시스템은 그대로 둔 채 두 정부의 독자 활동을 보장하는, 즉 1국가 2제도 2정부 형태의 연방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고려연방제는 ‘고려연방공화국 방안(1973)’을 거쳐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선결조건, ▲연방정부 구성 및 운영원칙, ▲연방정부의 10대 시정방침 등 세 가지를 담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1980)’으로 완성됐다.

멀리 바라보이는 동해선도로 남측 출입사무소 ⓒ스트레이트뉴스
멀리 바라보이는 동해선도로 남측 출입사무소 ⓒ스트레이트뉴스

그러나 당시 우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었다. 연방정부 구성 및 운영원칙이나 10대 시정방침이야 △남북경협 및 합작사업, △과학, 문화, 교육 등 각 분야 교류 활성화, △교통과 우편의 자유로운 이동,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 등 실현 가능한 조항들이 많았지만, 통일의 위한 선결조건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이 내건 선결조건은 ▲남한의 군사통치 청산, ▲미군 철수를 통한 긴장상태 완화, ▲미국의 남한 내정 간섭 종식 등이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으로서는 시쳇말로 ‘1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남쪽에서 고려연방제를 입에 담는 학생들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로 끌려가는 사이, 북한의 통일방안은 조금씩 변해갔다. 김일성 주석은 1991년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방안을 발표했고, 그의 사후인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의 현 정부가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민족통일기구만 구성하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을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고려연방제의 수위가 갈수록 낮아진 이유로 독일 통일의 충격을 들고 있다.

2차례의 군부 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군사통치가 청산되고, 미국의 내정 간섭이 사라진 2018년의 한반도, 김일성 주석이 내세운 선결조건 중 미군 철수가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김 주석의 손자는 선결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음에도 남북, 북미회담을 통해 아버지가 내세운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통일전망대 ⓒ스트레이트뉴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통일전망대 ⓒ스트레이트뉴스

어렵게 싹이 튼 평화의 기운이다. 한반도의 상황은 물리적 통일보다는 경제협력과 이산가족 상봉, 체육・문화 등 교류 우선으로 향하고 있고, 국제사회도 이런 상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큰 틀에서 ‘낮은 단계의 고려연방제’로 향하고 있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갈 수 없는 곳을 조금이라도 더 멀리 보기 위해 전보다 더 높은 통일전망대를 짓고 있는 정관섭씨, 그가 북한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바닷가에 톡 튀어나온 섬이 송도인데요, 섬 앞쪽에 가로로 길게 뻗은 도로 같은 거 보이죠? 저게 군사분계선입니다.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파주에서 걸어서 넘어갔던 분계선, 그게 동해에서 끝나는 지점이죠. 통일을 하네 마네 그러지 말고, 한 30년, 40년 서로 왔다갔다 하면서 북치고 장구 치고 그러다 보면, 저놈의 분계선이 슬그머니 바다로 들어가 버리지 않을까요? 그때가 되면 이 건물은 전망대가 아니라 호텔이 되어 있겠죠? 하하하...”

신축 중인 30m 높이의 전망타워 ⓒ스트레이트뉴스
신축 중인 30m 높이의 전망타워 ⓒ스트레이트뉴스

벌써부터 남북경협 관련 소식이 들려온다. 지난달 31일,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등 고위급 대표단은 평양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면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는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회사 가즈프롬(Gazprom)社 관계자도 참석했다.

가즈프롬은 이미 지난 4월 대구에서 한국가스공사와 천연가스 사업 관련 실무 접촉을 가진 데 이어, 5월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나 ‘남・북・러 PNG사업 추진 타당성 검토를 위한 공동연구 추진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수입하는 액화천연가스(LNG) 전량을 선박으로 수송해온다. 대북 제재와 대러시아 제재가 풀려 남・북・러 가스라인 사업이 진행된다면, 중국과 일본까지 연결하는 가스망 구축이 현실화될 수 있다. 가스라인은 특성상 도로망이나 철로 구축보다 훨씬 빠른 시일 내에 실현될 수 있는 남북경협 사업으로 꼽힌다.

남・북・러 가스라인 구축사업이 개성공단 재개와 함께 남북경협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을까? 수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첫 테이프를 끊기 위한 각국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남북고위급회담, 그리고 오는 6월 12일 개최될 북미정상회담과 이어질 남북미정상회담의 성공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김태현bizlink@hanmail.net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군사분계선 주변 풍경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군사분계선 주변 풍경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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