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對)한국 수출규제, 임진왜란과 다를 바 없는 기해왜란
일본, 끝도 없는 한반도 노략질 및 침략의 역사 이어가
조선 침탈에서 출발한 일본의 도약, 2차대전 패배로 기울어
일본이 벌인 모든 전쟁은 일본에 정당, ‘가해자 의식’ 없어
내부 문제 외부로 돌리는 근성이 이번 수출규제 불러와
‘한반도 vs 친일’의 역사 근거해 경제 아닌 역사로 판단할 때


[스트레이트뉴스=김태현 선임기자] 지난 1,600여 년 동안 한반도 침략을 밥 먹듯 했던 일본이 또 난리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총칼이 아니라 교역이다. 그러나 교역이 현대 국제정세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점에서, 일본이 일으킨 경제전란, 즉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는 임진왜란과 다를 바 없다. 바로 기해왜란이다.

일본의 한반도 침탈 역사

서기 400년, 왜구(이하 일본)는 백제와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를 쳤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격퇴됐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서기 663년, 일본은 백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전선 800여 척과 4만 여 명의 군사를 보냈지만, 신라군에 의해 또 다시 격퇴됐다. 이후 일본 내에서 삼한정벌설이 대두됐고,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악화됐다.

서기 753년(신라 경덕왕 12년), 일본의 권력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강요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내부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경덕왕이 사신을 내치자, 곧바로 신라정토계획이 수립됐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강요한 애초 목적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신라정토계획에는 3년 간 500척의 전선 건조, 후쿠오카 이토성 건축 등이 포함돼 있었다. 정보를 입수한 신라가 군제를 개편하는 등 대비에 나서자, 일본은 발해를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발해는 백제와 달리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발해가 거부하면서 신라정토계획은 무산됐고, 이후 통일신라는 발전을 구가했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발해의 영토와 교통로(우측 상단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동상)(자료:천안 국학원/KBS1TV 화면 갈무리)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통일신라시대 당시 발해의 영토와 교통로(우측 상단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동상)(자료:천안 국학원/KBS1TV 화면 갈무리)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왜구도권(16세기 명나라 해안에 출몰해 노략질하던 왜구 그림. 가로5.2mx세로32cm)(자료:쓰루다 게이/KBS1TV 화면 갈무리)
왜구도권(16세기 명나라 해안에 출몰해 노략질하던 왜구 그림. 가로5.2mx세로32cm)(자료:쓰루다 게이/KBS1TV 화면 갈무리)

그러나 일본의 한반도 침탈 및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다. 고려시대, 특히 고려 말기 공민왕부터 공양왕 때는 익히 잘 아는 바대로, 한반도가 왜구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가까운 해안은 물론 함경도, 평안도 해안까지, 또 내륙지역까지 왜구들이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은 횟수가 500회가 넘었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부 불만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15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이다.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전체주의를 다졌고, 이는 구한말 이후 세계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초석이 됐다.

열강 도약 위해 일본이 짓밟은 조선

일본의 전체주의가 처음 상륙한 곳은 강화도였다. 1875년 일본 운요호(雲揚號)가 측량을 빙자해 조선의 영해를 불법 침범했던 것이다. 전투가 오갔지만, 결과는 조선에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이었다.

당시 조선은 제정 러시아와 청, 일본이라는 늑대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리는 먹이였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만주와 한반도를 세력권으로 삼으려 했고, 일본은 그런 러시아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으며, 청 역시 러시아와 일본에 대항해 군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은 군사를 보내 해결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청의 세력 구축을 두고 볼 일본이 아니었다. 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곧바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이 청에 파병을 요청한 후였다. 양국은 충돌했고 전쟁을 택했다. 청일전쟁이었다. 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30여만 명을 학살한 일본군(자료:동학농민혁명 발발 120주기 기념 전봉준장군 평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30여만 명을 학살한 일본군(자료:동학농민혁명 발발 120주기 기념 전봉준장군 평전)

이후 민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렸다가 발생한 을미사변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됐다. 또한 일본이 청으로부터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 요동반도, 펑후제도를 받았지만, 러시아와 프랑스, 영국이 간섭하는 바람에 요동반도를 빼앗기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승리는 일본의 몫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한반도 침략 근성 중국으로 넓힌 일본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본은 유럽 열강에 전쟁 물자를 팔면서 이득을 챙겼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식민지 블록 경제를 가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과 달리, 이탈리아와 일본, 독일은 수출 감소와 실업자 폭증 등을 경험하며 대공황의 흙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경제위기는 항상 극단적인 인물과 극단적인 이념을 찾아낸다. 당시 경제위기가 찾아낸 인물은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였고, 이념은 파시즘이었다.

일본의 침략 근성은 양차대전 사이에도 멈추지 않았다. 만주사변은 일본의 침략 근성이 얼마나 강하고 집요한지를 대변해 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등 전승국들은 일본이 중국에 대해 영향권을 넓히는 것을 비난했고, 일본은 그 비난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 관동군은 3년 이상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중국군이 철도를 폭파한 것처럼 속여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승리는 일본이 차지했다. 일본은 그곳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만주사변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자료:상생방송 화면 갈무리)
만주사변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자료:상생방송 화면 갈무리)
사상 최대 규모로 개최된 ‘난징대학살 80주년 추도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2017.12.13)(자료:KBS1TV 화면 갈무리)
사상 최대 규모로 개최된 ‘난징대학살 80주년 추도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2017.12.13)(자료:KBS1TV 화면 갈무리)

일본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1937년, 일본은 허베이(河北)성 완핑(宛平)현 루커우차오(蘆溝橋) 근교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하던 일본군 사병 한 명이 실종된 것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난징에서 수십 만 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난징대학살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반도를 시작으로 1,600여 년 동안 승승장구했던 일본의 침략 야욕은 꺾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개전 3개월 만에 상하이를 비롯한 핵심 지역을 빼앗기며 고전했지만,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미국과 영국,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끝까지 싸웠기 때문이다.

일본의 오판에 의한 기해왜란, 역사의 눈으로 봐야

그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중일전쟁 발발 2년 후인 1939년의 일이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식민지와 함께 자급자족이 가능한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배경에는 오판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 발발 당시, 일본은 관망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독일이 엄청난 속도로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잠식해가는 와중에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자, 미국의 군사적 잠재력을 간과했던 것이다.

일본의 도발에 미국은 철강 및 석유 등 전략물자를 봉쇄하면서 참전했다. 동시에 미국은 엄청난 양의 군사물자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국과 맞붙은 결과는 일본의 참패였다.

일본인들이 도쿄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구식 군복을 착용하고 행진하는 모습(2014.08.15)(자료:AP/Dailymail by Koji Sasahara)
일본인들이 도쿄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구식 군복을 착용하고 행진하는 모습(2014.08.15)(자료:AP/Dailymail by Koji Sasahara)

서기 400년 이후 이웃 한반도를 끊임없이 침략했던 일본이다. 침략한 횟수와 동기로만 따져도 일본에 한반도는 노략질 대상에 불과했다. 그것도 모자라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에 이은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이다. 일본이 전쟁국가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그럼에도 가해자 의식은 거의 없다. 악화된 내부 여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행위, 먹거리가 모자라 피해를 입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하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이 벌인 모든 전쟁은 일본에 정당하다.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는 일본 정치인들의 행보, 군국주의 시절이 그리워 때만 되면 낡은 군복을 입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그 반증이다. 전체주의가 오랫동안 지배한 일본은, 그래서 지금도 그 자체로 극우다.

이번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역시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이 중국 및 동아시아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이다.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에 ‘신뢰’를 들고 나선 것은 피해자 코스프레의 전형이다.

일본에 의한 또 한 번의 한반도 침략전쟁이 시작됐다.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전쟁의 최종 목적은 먹거리, 즉 경제였다. 정치는 결국 어떤 경제시스템을 채택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일본의 도발도 한반도를 대상으로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란’에 다름 아니다. 기해왜란(己亥倭亂)이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에 대한 항의, 참의원 선거 이용 등 정치외교 현안을 해결할 목적으로 교역이라는 경제적 무기를 사용함에 따라 향후 퇴로 없는 공방이 불가피해진 한일관계(자료:reseauinternational.fr)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에 대한 항의, 참의원 선거 이용 등 정치외교 현안을 해결할 목적으로 교역이라는 경제적 무기를 사용함에 따라 향후 퇴로 없는 공방이 불가피해진 한일관계(자료:reseauinternational.fr)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왜란이 이미 시작됐고, 참의원 선거를 마친 일본의 수장, 아베 신조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더 많은 군사를 보내겠다는 두 번째 선전포고다. 수하 장수 고노 다로는 우리 장수를 불러다가 ‘무례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일본의 선전포고 이후, 우리 국민은 물론 북한까지 가세해 일본을 맹비난하고 있지만, 한국의 일부 정치인과 학자들은 ‘냉정함’을 강조한다. 심지어 공격의 화살을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돌리는 대표급 정치인들도 다수다. 수십 년 동안 ‘친일’ 혐의를 받아온 일부 언론들도 행태도 매한가지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이 그들을 향해 “누구 편이냐”고 성토하는 이유다.

상대가 이미 선제공격을 가해 온 마당이다. 공격이 시작된 후 이른바 ‘후제대화’에 임해봐야 우리가 얻을 것은 없다. 대화는 양측의 세가 팽팽할 때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격을 방어하거나 방어에 유리한 공격을 가할 때이지, 경제적 이유를 들어 공격한 쪽을 편들 때가 아니다.

작금이 안타까운 것은, 일본의 선제공격을 경제적인 논리, 우리 경제가 입을 피해에 관한 논리로만 판단하는 부류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일본의 1,600여 년 한반도 침략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해답은 기해왜란을 경제적 시각이 아닌 역사의 눈으로, ‘한반도 대(對) 친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미래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세계를 조망하는 듯한 ‘냉정함’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일본을 두둔하거나 중립적인 언사를 내뱉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국치의 날에도 ‘냉정함’을 앞세운 친일파는 있었다.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던 상대가 또 침략을 감행해 오지 않았나. 일본이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부위를 건드렸고, 또 다른 분야까지 지속적으로 건드릴 거라며 전쟁을 선포했다. 한번 굶어 보라는 것이다. 작금, 먼저 나서서 미래지향적이고 상호 협력하는 한일관계를 거론할 때는 결코 아니다.
bizlink@straigh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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