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정부·정치권 입김에 ‘볼커의 실수’ 되풀이 말아야

좋은 통화정책은 지루하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제12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었던 '폴 볼커'를 대표하는 표현이다.

1971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 정부가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신용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금융경제 시스템을 만들면서 인플레이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여기에 1·2차 오일쇼크까지 더해지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반대로 실업률은 늘어났다. 정상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물가가 상승한 것이 아닌 상황이었다.

당시 구원투수로 등판한 건 폴 볼커다. 그는 ‘인플레이션 파이터(inflation fighter)’라고 불릴 정도로 물가 상승 억제에 총력을 다했다. 

그는 토요일이었던 1979년 10월 6일 긴급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개최해 한 번에 금리를 4%포인트 인상했다. 이를 시작으로 1980년 3월 3일에는 금리를 20%까지 올린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전 세계 어느 국가든지 중앙은행의 고강도 통화정책으로 경기가 침체되면 정권 지지율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금리가 급등하면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됐고, 이로 인해 실업률이 치솟으며 많은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 봄 볼커는 재선 운동을 앞둔 지미 카터 대통령으로 부터 통화정책 완화 압박을 받는다. 이 영향으로 통화정책에 브레이크를 걸면서 같은 해 6월 5일에는 금리를 9.5%까지 내린다. 

그러자 개선세를 보였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고, 경제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후 카터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고 폴 볼커는 정책금리를 다시 19% 수준으로 돌려놓게 된다. 경제계에선 이 사건에 대해 ‘볼커의 실수’라고 표현한다.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대중에게 부각된 것도 사실 이 사건이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볼커의 경우 본인 스스로가 통화정책이 대담하고 극적인 조치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경제 안정성을 위해선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정책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혁신적이거나 극적일 경우 단기적으로는 주목받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경제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경제계 흐름을 보면, 당시 미국 상황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한국은행은 전날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3.50%로 동결했다. 13회 연속 동결이다. 물가 상승률 수준만 놓고 봤을 때는 이미 통화정책 완화 요건을 갖췄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8월 금리인하설이 제기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금리 동결 결정은 금통위원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이 배경에는 단연 부동산 거품과 가계부채 이슈가 핵심으로 작용했다.

이창용 총재는 금통위 후 기자간담회에서 “유동성을 과잉 공급해 부동산 가격 상승의 심리를 자극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부동산 시장에 돈이 몰리고 대출이 늘어나다가, 경기가 나빠지면 부동산 경기를 다시 끌어 올리는 상황이 반복되는 게 한국 경제에 좋은 일인가”라며 “그런 고리는 한 번 끊어줄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아쉽다”는 입장이다. 이날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원내대책회의 후 금통위 결정을 존중한다”면서도 “내수 진작 문제에서 봤을 땐 약간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전날 윤석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역시 “금리 결정은 금통위의 고유 권한이지만, 내수 진작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이례적이다. 금융당국은 2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지난 7월 1일에 도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행을 코 앞에 두고 돌연 9월 1일로 미뤘다. 금융당국은 이 같은 연기 배경에 대해 ‘자영업자 자금 여건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 연착륙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대통령실이 DSR 규제 연기를 주도했다"는 말이 나왔다.

현재 한국의 통화정책이 지루한 건 사실이다. 한때 한국은행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나 유럽중앙은행(ECB)보다 훨씬 먼저 금리를 인상했고 이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ECB는 6월 금리를 먼저 내렸고 미국 연준 역시 9월 FOMC에서 통화정책을 완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상황이다.

이제는 국민들이 지칠 법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 총재는 “모두가 힘든 상황인 것을 알고 있지만, 참고 견뎌야 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밝혀 왔다.

추측하건데 이 총재를 비롯한 금통위원단도 볼커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다. 한국은행이 정부와 정치권 입김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통화정책을 펼치고 한국의 경제를 운전하길 바란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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