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경쟁력 한계 노정(露呈)…고부가가치 금융 키워야
금융은 상식에 기초…예측가능성 떨어지면 신뢰 잃어

24일 코리아밸류업 지수를 발표하는 정은보 KRX 이사장. 한국거래소 제공.
24일 코리아밸류업 지수를 발표하는 정은보 KRX 이사장. 한국거래소 제공.

한국전쟁 이후 IMF구제금융 시기를 제외하곤 한국 경제는 쉼없이 성장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 ‘빠른 추적자’(Fast Follower)로서의 한계에 달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터져나옵니다. 값싼 노동력과 교육열, 특유의 집념과 개인의 희생, 기술 모방에 기댄 제조업의 경쟁력이 수명을 다해가는 이때 서비스산업, 특히 금융의 부진이 아쉽습니다. 금융의 선진화에 앞서 신뢰를 쌓기 위해 상식에 기초한 시장 예측가능성 제고가 필요한 때입니다.

지난 27일 한국은행은 대한상공회의소와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리차드 볼드윈 국제경영개발원(IMD) 국제경제학과 교수가 초빙됐습니다.

볼드윈 교수는 이날 “인공지능(AI)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해 한국의 서비스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제조업 중심의 경제성장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고, 부가가치와 고용 창출에 있어 제조업보다 더 효율적인 서비스업을 키우기 위해 AI를 활용하면 기존 선진국들의 자리를 신흥시장에서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 예로 중국과 인도의 놀라운 서비스 수출성장률을 거론했습니다.

각론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이 서비스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데 이론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발표된 한국은행의 국민계정 개편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명목 GDP(국내총생산)는 2401조원으로 호주(13위)를 제치고 12위로 올라섰습니다.

한국과 호주는 매년 명목GDP에서 앞치락 뒤치락 하며 10위권 초반 자리다툼을 합니다. 다만 한국의 인구(약5200만명)가 호주(약2600만명)의 두 배인 관계로 1인단 GDP는 호주가 우리보다 2배 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는 전체 산업 내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입니다.

외교부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호주의 GDP에서 서비스업 비중은 70% 이상입니다. 다만 제조업 비중은 약 10% 수준에 그칩니다.

한반도 면적의 약 35배인 나라인 만큼 천연자원이 많고, 금융업과 관광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조 분야에서 호주가 무얼 만들고 있는지 떠올리기 쉽지 않습니다.

한국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 손으로 만든 휴대폰, 자동차, 철강, 조선, 요즘엔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이 수두룩합니다.

문제는 인건비와 기술적 수월성입니다. 세계 공장의 지위를 인도에 넘겨줬다는 중국이 기술력에서 우리를 넘어섰다는 것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입니다. 인건비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비단 호주 뿐 아니라 주요 선진국 중 제조업 비중이 우리처럼 높은 나라는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엔 인건비 경쟁에서 신흥시장과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지금 가전 분야에서 삼성과 LG과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있지만, 미국을 위시한 상당수 나라가 이 산업을 포기했기 때문에 찾아온 순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할 지 모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은 총부가가치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7.6%로 그나마 직전 29.4%에서 내려온 수준입니다. 다만 여전히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입니다. 선진국 중에 유일하게 제조업 경쟁력이 강한 독일이 자동차 시장은 평정할 망정 금융에 있어서는 미국이나 영국 수준의 위상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새겨볼 부분입니다. 최근 중국 내수가 흔들리자 BMW와 폭스바겐 등이 크게 동요하고, 독일 2위 은행인 코메르츠방크의 최대 주주로 이탈리아의 우니크레디트가 올라선 일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최근 만난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금융만큼 안전한 비즈니스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조업이나 바이오야 반도체 전쟁 승패 여부나 신약개발 과정에서 큰 리스크가 따르지만 금융은 상식에 기초해 예측가능성에 기반한 비즈니스가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물론 이미 그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영미 선진국들과 비교해 트랙레코드(경험)가 부족한 차이 극복이 관건입니다.

앞선 관계자는 우리나라 금융이 영미 제도를 가져오면서 우리에게 맞게 수정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예외가 생긴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예외들이 외부의 시각에서 우리 금융산업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한다는 지적입니다.

지난 24일 한국거래소는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내놨습니다. 연초부터 우리 시장의 뜨거운 감자였던 밸류업(기업가치제고)의 첫 성과물이자, 100개로 한정된 기업 내에 어떤 기업들이 포함될 지가 관심이었습니다.

뚜껑을 열자마자 기대했던 시장의 흥행 열기 보다는 종목 선정의 기준이 무엇인지 갑론을박이 터져나왔습니다. 특히 국내 대표 금융지주인 KB금융이 빠진 부분이나, 제외될 가능성이 있었던 SK하이닉스가 지수에 편입된 이유 등에 대한 석연치 않은 설명에 외국계 투자은행들을 중심으로 조롱에 가까운 쓴소리들이 터져나왔습니다. 거래소 측도 이를 의식해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선정의 배경과 취지 등을 설명했지만 시장 반응은 냉소적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50bp인하라는 선제적 조치로 금리 인하를 단행했지만, 우리 은행들의 가계대출금리는 오히려 오르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금융당국은 금리를 올리는 방법 외에 포트폴리오 조정으로 가계대출을 진정시키라고 했지만 이론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투자자들과의 기울어진 운동장 이야기가 나오며 우리 시장에선 전세계에 통용되는 ‘공매도 제도’가 실행되다 철수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금융지주들은 연초 꺼낸 주주환원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합니다. 은행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소외계층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공헌 보도자료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부는 2년 연속 정부의 실력을 의심케 하는 세수 펑크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기업들의 실적 저하에 따른 법인세 감소가 주 원인이지만 그 또한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아쉽습니다. 왠지 이런 펑크를 은행들이 메우고 있는건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지분율이 60~70%에 달하는 외국인 주주들이 관치금융으로 치부되는 한국 은행들에 믿음을 가지고 장기투자할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국책은행 관계자의 말이 뇌리를 스칩니다. “제도를 가져오려면 그대로 가져와야지 예외를 두는 것은 신뢰를 얻기 어렵다.”

KB금융 전임 회장인 운종용 회장은 은퇴 전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1위인 KB가 글로벌 순위는 60위권이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꿈꿨지만 완수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쉽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구구조가 급격히 변화하고, AI라는 새로운 화두가 던져진 지금, 제조업의 짐을 금융이 나눠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금융의 근간인 ‘신뢰’를 쌓아야 하고, 글로벌스탠다드와 우리와의 거리 차이를 재점검해볼 때입니다. 예측 밖의 일이 너무 자주 생기면 신뢰가 무너진다는 평범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스트레이트뉴스 장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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