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공-민간 협력을 통해 다양한 대응책 가동
“치매는 사회 전체의 위험...지속가능한 돌봄 체계 형성 필요”
금융학계에서 치매 고령자를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수용하는 정책 전환과 보험업계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에서는 이미 공공-민간 협력을 통해 요양시설, 치매보험, 가족신탁 제도 등 다양한 대응책을 가동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대비 수준이 미흡하다는 것이다.
◆ “치매 고령자, ‘부담’ 아닌 지역사회의 주체로 바라봐야”
26일 생명보험협회와 RMI보험경영연구소, 보험연구원은 서울 광화문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초고령사회, 치매와 보험의 역할’을 주제로 한·일 세미나를 개최했다.
류재광 일본 간다외국어대학교 교수는 “보험업계도 치매 친화적 사회 조성을 위한 파트너로 참여해야 한다”며 “단순한 후견 서비스 제공을 넘어, 치매 예방과 치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고령자 전용 요양원 설립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공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헀다.
류 교수는 “치매를 인식하는 기존 정책의 틀은 치매 고령자를 ‘부담’ 또는 ‘관리’의 대상으로 한정짓고 있다”며 “이제는 치매 고령자를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치매로 인한 개인적 고통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치매 고령자는 늘 돌봄의 대상이자 관리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이다.
류 교수는 “이러한 관점은 자립적 일상생활을 지원하려는 지역사회의 의지와 노력까지 제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치매 고령자도 스스로 일상과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정책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류 교수는 “일본에선 치매 환자가 생활하는 그룹홈에 대학생 셰어하우스를 병설해 일상 속 자연스러운 세대 간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며 “치매 어르신과 대학생이 함께 밥을 먹고 대화하며 공존하는 사례에서 새로운 돌봄의 가능성을 봤다”고 설명했다.
이어 “요양보호사 자녀가 생활하는 시설에 치매 고령자가 함께 어울리는 환경을 조성하면, 치매 어르신이 돌봄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돌봄에 참여하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며 “시설 중심의 경직된 돌봄에서 벗어나 일상과 돌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향으로 정책이 재설계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책 거버넌스 개선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류 교수는 “한국은 현재 치매 고령자 당사자나 가족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체계가 미비하다”며 “일본처럼 치매 고령자와 가족의 의견을 직접 청취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공식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고베시는 2019년부터 치매 진단을 받은 자에 대해 보험료를 부담하고 최대 2000만 엔 규모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손해보상보험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가나가와현 야마모토시는 치매 환자에 등록번호를 부여하고 행방불명이 됐을 때 지역센터, 경찰서, 대중교통기관 등에 공유해 수색을 실시한다. 야마사니현 츠쿠오카시에선 치매 공령자 등이 주체적으로 활동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치매 카페’를 운영 중이다.
일본 보험상품도 변화하는 추세다. 아사히생명 ‘인생100년 시대의 치매보험’은 치매 진단 시 일시금 30만 엔, 최대 500만 엔을 지급한다. 닛세이 미라이노가타치 치매보장보험은 치매를 조기에 발견한 경우 진단 보험금의 10%를 일시금으로 지급한다.
김명중 일본 닛세이기초연구소 상석연구원은 “치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치매 고령자 가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치매 서포터 등의 보급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은 치매 카페 등 지역사회 중심의 케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환자와 가족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말했다.
김 상석연구원은 “현지 지자체는 보험회사가 적극적으로 치매 관련 활동을 실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며 “의료통계 데이터 서비스를 기업에 제공해 기업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은 가족신탁을 제공하는 금융기관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이고 한국도 ‘치매 머니(Money)’에 대한 대책으로 가족신탁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해당 가족과 재산에 적합한 맞춤형 신탁을 설계할 수 있도록 가족신탁 전문가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에서는 가족신탁보급협회가 2013년에 설립되어 가족신탁에 대한 홍보, 상담, 가족신탁 전문사 연수, 변호사, 세무사, 사법서사와 신탁 상담 고객의 연결 등을 실시하고 있다”며 “법무법인과 세무법인이 가족신탁을 운영하기 위해 신탁 회사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일본, 메디컬 케어로 요양시장 성장…“한국도 공공성 확보해야”
류건식 RMI보험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초고령 사회에서 치매는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위험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보험업계가 치매 친화적 사회를 만드는 데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치매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예방과 조기 진단, 지속적 치료를 지원하는 캠페인을 보험사들이 앞장서야 한다”며 “단순한 보장상품 판매를 넘어, 보험 영업자료를 통해 치매 예방 및 치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등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험사와 의료계, 요양기관 간 협력을 통해 ‘치매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고객 중심의 지속가능한 돌봄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치매에 특화된 보험 인재 양성도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류 연구위원은 “고령사회 진입에 따라 최근 보험사들의 요양원 비즈니스 진출이 늘고 있다”며 “앞으로는 치매 고령자 전용 요양원에 특화된 서비스 제공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치매 전문 요양보호사를 육성하고,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차별화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사례도 언급했다. 그는 “일본에서는 메디컬 케어 서비스 그룹이 치매 고령자를 위한 전문 요양원을 운영하며, 2024년 기준 329개 시설, 총 병상 수 2만여 개, 연매출 약 400억엔 규모로 성장했다”며 “국내 보험업계도 공공성을 갖춘 요양 서비스 모델을 구축하는 데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규동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치매 발생 이전에 본인의 노후를 직접 설계할 수 있도록 하여 본인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치매 환자들이 금융 사기나 경제적 학대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특히 보이스피싱 등의 금융 사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양호 한국리스크관리학회 회장은 “급속한 고령화가 단순한 인구 구조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일본이 초고령 사회의 선두에 있다면 한국도 그 길목에 서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고령화는 의료 체계, 복지 재정, 가족 구조, 공공 인프라 등 사회 전반에 복합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특히 치매는 환자 개인을 넘어 가족과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리스크관리학회는 보험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보험은 단지 개인의 재정 부담을 덜어주는 수단이 아니라, 장기적 건강 리스크에 대응하고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공공적 안전망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현실은 치매에 특화된 보험 상품이나 서비스 모델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고, 제도적으로도 정착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최 회장은 “공공과 민간의 역할 분담, 예방 중심의 통합적 접근, 수요자 맞춤형 설계 등 여러 과제가 남아 있지만, 치매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덧붙였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