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코리언, 외계인은 에일리언, 노숙자는 길리언」
「길에서 배운 두 가지, 인간의 가치와 복지」
「복지를 비켜간 정치인들의 어처구니없는 행태」
「나라는 위하는 것이 아니라 팔아먹는 것?」
설을 앞두고 시장과 군부대, 양로원 등을 찾는 정치인들의 민생행보가 거듭되고 있다. 정치인들이야 한 컷이라도 더 노출되어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일반 국민들은 그들의 행보를 어떤 시각으로 볼까?
설날 하면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작은 사건이 하나 있다. 그 사건을 통해 정치인들의 설 민생행보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을 가름해 보자.
길리언Gillian의 삶
길리언... 내가 지어낸 말이다. 한국에 사는 사람은 코리언, 지구 밖에 사는 존재는 에일리언, 그래서 길리언은 길에서 사는 사람, 즉 거리에서 자고 생활하는 노숙자露宿者를 의미한다.

지금은 인문작가와 강연가로, 칼럼니스트로, 또 영화기획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의 전직은 여수역과 서울역을 집삼아 생활하는 노숙자였다. 그냥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 체험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노숙, 그것도 시간과 정도를 불문하고 초고수급에 드는 노숙자였다.
그런 탓에 이빨이 14개밖에 남지 않았고, 뼈에 한기가 들어 다른 사람들이 반팔을 입기 시작하는 4월에도 내복을 입지 않으면 별로 남지도 않은 이빨들이 아래위로 딱딱 부딪히며 탱고를 추는 신세가 되었지만, 노숙 경력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아니, 돈이면 다인 줄 알고 설쳐대던 내게 찾아온 거지 생활에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다.
길에서 배운 것
고마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천상천하유전독존天上天下唯錢獨尊’을 외치며 인간을 돈의 가치로만 판단하던 저급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거지가 되는 두 가지 요인, 즉 사회구조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 중 사회구조적 요인이 더 크며, 따라서 사회를 구조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이 없고서는 복지로 갈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강원도 산간이나 섬에서 초등학교를 옆문으로 나온 청년과 대학을 졸업한 청년의 인생 출발점은 동일선상에 있지 않다. 섬 출신 청년이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면 그의 출발점은 더 뒤로 밀린다. 거기에 아버지의 잦은 음주나 구타, 부모의 가출 등 아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까지 겹쳐져 있다면, 그 청년의 출발점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출발점이 아예 없는 현실은 우리나라의 발전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국가가 선진국 문턱에 이르는 동안, 초등학교 옆문으로 나온 청년이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차츰 사라져갔다. 신발공장이 그렇고, 가발공장이 그렇고, 대기업 중심 경제정책 운용에 따른 중소기업의 감소, 가내수공업의 퇴출 등이 그렇다. 천신만고 끝에 공장에 취직했다 해도,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비정규...
할 수 있는 일이라야 오토바이 배달이나 건설현장 일용직 잡부뿐이다. 그러다가 150kg짜리 모터에 발목이 찍혀 그런 허드렛일마저도 할 수 없었던 나처럼, 어디 한 군데 삐걱하는 날이면, 그날로 거지다.
여야를 떠나 모든 정치인이 복지국가를 입에 올리는 시절이다. 어차피 복지국가로 갈 수밖에 없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대한민국은 벌써부터 복지대국이다.
내가 거리에서 깨달았던 것은 개인적 요인과 사회구조적 요인을 가장 복합적이고 또 첨예하게 포괄하고 있는 부류가 바로 길리언 생태계라는 점이다. 그런 만큼 해결하기 어렵고, 그래서 한 국가의 복지 시스템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어처구니없는 맷돌들
그래서일까, 당장 눈에 보이는 사회구조적 요인이라도 고치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쓰고,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인 돕기 행사도 벌이고, 서류를 만들어 부지런히 정치인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돈도 조직도 없는 일개 노숙인을 도와준 이들은, 역시 돈도 조직도 없는 개인 자원봉사자들뿐, 정치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설 전날 아침,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말, 잘들 아실 것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소리다. 구전에서 말하는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기 위해 장착해놓은 막대기 또는 맷돌 홈이고, 기록에서 말하는 어처구니는 궁궐이나 대갓집 용마루를 장식하는 십장생 동물 형상의 토우다.
둘 중 어느 것이라 해도 어처구니가 없으면 기가 막힌다. 막대기 없는 맷돌을 어떻게 돌릴 것이며, 토우 없는 용마루를 본 대감의 반응은 어땠을까?
명절이 되어도 길리언들은 갈 곳이 없다. 오라는 데도 없다. 밤새 떠느라 몽롱한 정신을 이끌고 찾는 곳이라야 그나마 해가 비치는 양지뿐이다. 그래서 겨울 아침이면 햇볕이 드는 서울역 광장 한쪽 귀퉁이에는 길리언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굶주린 양지받이에 바들바들 해바라기다. 널어놓은 빨래 같기도 하고, 전깃줄에 앉은 참새 같기도 하다.

“어우, 겁나게 추워부는구마이...”
“따뜻한 데서 잠 좀 잤으면 소원이 없것다...”
“설인데... 뭐 쫌 없나...?”
한복 입은 아내와 정장 한 남편은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다닌다. 때때옷 입고 쫄래쫄래 엄마를 따라가는 꼬맹이는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
출발시각을 알리는 전광판과 열차 출발을 알리는 방송에서, 길리언들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가족을 본다. 그래서 웬만큼 춥지 않으면 대합실로 들어가지 않는다. 명절만큼은 말이다.

작은 사건이 일어난 시각은 길리언들의 몸이 스르르 풀어지는 9시경이었다. 당 대표를 필두로 약 1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양지받이를 하고 있는 길리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길리언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나타난 목적이야 뻔했다. 얼마 남지 않은 선거판을 위해 귀성객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한 것.
“어... 저것들 뭐여?”
“보믄 몰르냐? 국개의원들이잖어.”
“국개의원이 머당가. 그려도 나라를 위해서 거시기허는 사램들인디...”
“허이구, 나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들 묵고 살라꼬 그라는 기지.”
“긍께... 나라는 말이여, 위하는 것이 아니고 팔아묵는 거랑께. 씨부럴...”

그때, 당 대표를 알아본 어느 길리언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대표님!”
당 대표,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길리언을 쳐다보았다.
“대표님, 차말로 고생이 많으시구만요이!”
당 대표, 그제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 길리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놀란 길리언들, 전깃줄에 앉아 있다가 포르르 날아오르는 참새들처럼 벌떡 일어섰다. 참새들이 일어서자, 당 대표는 더 놀랐다.
“대표님, 거시기... 민생이라 카는 거 있지 않애요.... 그것을 챙길 때요이, 우덜도 쪼까 챙기주모 어떠요?”
“하하하...”
“우덜이 쪼까 춥어가꼬 디리는 말씀이요이...”
“하하하하...”
참새 몇 마리와 악수를 나눈 당 대표는 그길로 휑하니 대합실 쪽으로 향했고, 국회의원 일행도 차도를 횡단하는 참새들처럼 줄줄이 뒤따라 나섰다. 그때 맨 뒤에서 뒤따라가던 국회의원 한 사람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서, 화사한 미소까지 곁들여가며, 희망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잘 부탁합니다! 새민주국민누리당입니다! 하하하하!”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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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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