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지르고 땜질하면 된다는 안일함
일관성 없는 정책…무너진 신뢰 복구 어려워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뚫고 나오면서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높아진 시장의 변동성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노력 중입니다. 다만 준비가 덜된 설익은 정책들로 오히려 국민 피해가 커진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당초 이달 15일부터 시작 예정이던 ‘퇴직연금 실물이전제도’ 시행이 이달 말일로 연기됐습니다. 기존에는 퇴직연금 가입자가 사업자(금융회사)를 바꾸고 싶으면 투자자산을 모두 현금화해 회사를 옮긴 후 재가입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수수료문제, 행정상 불편함, 투자기회 상실 가능성에 따른 기회비용 등의 문제가 있었고, 결국 회사를 옮기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됐습니다.
저출생에 따른 인구구조의 급변, 이에 따른 연금 수급 불안 등으로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에 대한 사회적, 개인적 관심이 커진 상황에서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는 꼭 필요한 정책이라는데 이견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보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된 사유로 거론되는 ‘안전한 전산망 구축을 위한 업계의 요청’이라는 설명이 그리 와닿지 않습니다. 한 증권사 IT본부장은 “서비스를 오픈하기로 시한을 못박고 이것이 어렵게 되자 그 원인을 업계의 탓으로 돌리는 측면이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현재 퇴직연금과 관련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2005년 말부터 시작돼 20년을 향해가는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사업자들이 많은 투자와 노력을 해왔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국민연금이 사업자로 참여하겠다는 논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수익률 제고를 위한 고육책이긴 하지만 그간 시장 조성에 힘써온 사업자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시도이고, NPS의 수익률 제고와 국민연금이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 활용하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 충분합니다.
이런 모든 논의들의 시작은 퇴직연금 수익률이 시원치 않아 노후 대비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가뜩이나 미래가 불투명한 국민연금의 보조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우려입니다.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시행된 ‘퇴직연금디폴트옵션’에도 불구 가입자들이 투자금 90%를 예금 등 초저위험 상품에 ‘올인’한 결과 물가상승률도 따라가지 못하는 수익률을 보였습니다.
이 또한 성급한 제도 시행의 결과입니다. 이미 영미권의 연금 선진국들이 디폴트옵션을 투자상품 위주로 운영한 것과 달리 일본이 디폴트옵션에 예금을 넣었다가 실패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은행들의 논리에 밀려 업권간 조율이 안되자 울며겨자먹기로 반쪽짜리 디폴트옵션을 출범시킨 것 자체가 잘못이었습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연초부터 대통령이 한국거래소를 찾으며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를 천명하고 이를 위한 방편으로 역시 일본에서 시도해 성공했다고 평가한 ‘밸류업프로그램’을 벤치마크해 지난 달 발표했지만 그 결과는 아쉬움을 넘어 부작용까지 낳고 있습니다. 편입돼야 할 종목들은 빠지고, 편입된 종목들이 시장의 공감을 얻지 못하자 매해 6월 바꾸기로 한 지수 편입 종목을 연내 다시 교체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이에 의지해 투자전략을 짜야 했던 투자자들은 뜻밖의 피해를 보게 됐습니다. 또 지수가 출범했음에도 외국인들의 한국시장 매도 행렬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삼성전자 등 대표 종목의 미래 성장성에 대한 우려가 반영됐다 하더라도 밸류업 지수가 한국 주식시장을 견인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 저지르고 바꾸면 된다는 또 하나의 사례로 남게 됐습니다.
지난 17일 정무위 국정감사장에 나온 이복현 금감원장은 대출금리에 과도한 개입을 했다는 ‘관치금융’ 지적에 "당시 가계대출 추세를 꺾지 않았으면 최근 한국은행 금리 인하도 어려웠을 것"이라며 개입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금감원은 그간 시장 자율에 맡길 뿐 금리에 직접 개입하진 않는다는 입장을 보여왔습니다. 또 가계대출을 줄이는 방법으로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올리는 것을 두고 당국의 생각과 다르다는 발언을 이어왔습니다. 갑자기 국감장에 와서 생각이 바뀐 것일까요?
정부도 어려운 현실 속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정책을 세우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걸 의심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면밀한 검토와 시장 담당자들의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인다면 일단 시행하고 자꾸 땜질하거나 했던 말을 주워담아야 하는 일들은 줄어들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것이 시장을 안정시키고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라는 상식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스트레이트뉴스 장석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