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투명성 및 경영진 신뢰도 악영향
연초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선보였지만, 밸류업 우수 기업으로 선정된 곳들 조차 일반 주주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정책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스트레이트뉴스는 <밸류업 역행하는 기업들> 시리즈를 통해 선정 기업들의 경영 투명성과 주주가치 제고 실태를 점검하고, 정책의 효과를 되짚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최근 시장에선 ‘고려아연이 정부가 추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취지를 저해했다’고 지적한다.
MBK파트너스와 영풍그룹 연합이 지분 경쟁에 들어가면서 고려아연 측이 지분 확보에 열세를 보이자, 회삿돈을 이용해 주가 방어에 나서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아연은 이달 초 유상증자 계획을 번복해 시장 투자자의 혼란을 야기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선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계획 수정이 기업 투명성 및 경영진 신뢰도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한다.
25일 금투업계에 따르면, 이날 최영범 고려아연 회장의 우호 세력으로 꼽혔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와 윤관 블루런벤처스(BRV) 대표는 각각 보유중인 고려아연 주식 지분율 0.7%(915만5000여주), 지분 0.5%(653만9285주)를 처분했다. 최 회장의 우군으로 꼽힌 한국투자증권은 이달 초 고려아연 지분 0.8%를 전량 매각했다.
1949년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공동 설립한 영풍그룹은 1974년 고려아연을 설립했다. 이후 고려아연은 최 씨 일가가, 전자 부문 계열사는 장 씨 일가가 맡는 ‘분리 경영’을 해 왔다.
그러다 2022년 최기호 창업주의 손자인 최 고려아연 회장이 취임한 이후 최씨 일가와 영풍그룹 장씨 일가 간 고려아연 지분 매입 경쟁이 벌어지면서 양측은 경영권 갈등을 빚고 있는 상태다.
9월 12일, 사모펀드 회사인 MBK는 영풍과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 계약을 체결했다. 다음날인 13일, MBK·영풍 연합 측은 1주당 66만원에 고려아연 주식 공개 매수를 시작했다. 동시에 영풍은 고려아연 자사주 취득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같은 달 26일, MBK·영풍 연합은 공개매수 가격을 75만 원에서 83만 원으로 상향하고 지분율 확대에 나섰다.
이에 맞서 10월 1일에는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이 영풍정밀 공개매수를 공고했고, 2일에는 법원이 영풍의 고려아연 자사주 취득 금지 가처분을 기각했다. 고려아연은 이사회에서 1주당 83만원에 자사주 15.5% 매입을 결의했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 매수 중지 추가 가처분을 신청했다. 같은 달 4일에는 MBK·영풍 연합이 고려아연 지분 공개 매수가를 83만원으로 상향하고 공개 매수 기간을 연장했다.
지난달 14일에는 MBK·영풍 연합의 공개매수가 종료되었으며, 지분 5.34%를 추가 확보하여 총 지분율이 38.47%로 증가했다. 23일에는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가 마감되면서 회사는 자사 총 주식의 11.26%인 233만1302주를 매입했다. 이로써 고려아연 측의 우호 지분은 기존 33.99%에서 35.4%로 증가했다.
지난달 30일 고려아연은 “이사회를 열고 보통주 373만2650주를 주당 67만원에 일반 공모 형태로 신규 발행하겠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은 ‘유상증자로 조달한 자금 중 2조3000억원을 채무상환에 쓰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전체 발행주식량의 20% 규모다. 금감원은 다음날인 31일 긴급브리핑을 진행했다.
함용일 금감원은 부원장은 “고려아연의 공개매수 신고서와 유상증자 신고서 간에 모순이 있는지, 재무 등 계획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부실 기재가 있었는지 여부를 철저히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월 1일 고려아연 측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금융 당국에 전달하는 한편 유상증자를 일정대로 진행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6일 금감원이 유상증자 관련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하면서 파장이 커지자 13일 고려아연 경영진은 유상증자 추진 계획을 철회했다.
고려아연 주가는 9월 12일 종가 기준 55만6000원 수준이었으나, MBK·영풍 연합과 지분 경쟁 이슈로 10월 29일에는 주가가 154만3000원까지 치솟았다. 약 40여일 만에 무려 177.51%씩이나 치솟은 것이다.
그러나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계획 철회 발표 후 주가는 다시 빠르게 내리는 상황이다. 최 회장의 우군이었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등이 지분을 정리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가는 하루만에 4.55% 떨어진 90만3000원으로 마감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통상적으로 설비투자 등 중요 안건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부족할 때 유상증자를 하는데, 고려아연은 ‘무엇을 위한 유상증자인가’라는 것이 뚜렷하지 않다”고 말했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고려아연이 지분 방어를 위한 자사주를 매입하기 위해 약 2조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을 밝힌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가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으나 금융규제당국 압박 철회를 결정하며 주주가치가 훼손됐다”며 “특히 기업의 투명성과 경영진에 대한 신뢰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증권업계 다른 관계자는 “고려아연 사태가 안타까운 이유는 회사의 가치를 의미있게 높였다기 보단 경영진이 주주가치를 훼손하면서 경영권 방어에만 집중한 부분”이라며 “설령 회사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더라도, 이번 사태가 지나간 이후 과도하게 높아진 주가를 합리화할 수 있는 실적을 내지 못하면, 결국 주가는 하락하고 주주들에게 2차 피해가 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용평가업계에선 고려아연의 신용등급 하락을 예고했다. 신은섭 한국기업평가 선임연구원은 “현재 고려아연의 이자·법인세·감가상각비 차감 전 영업이익(EBITDA) 대비 차입금이 9월 말과 비교해 1.7배 증가한 상황”이라며 “실효성 있는 대안 제시와 원활한 이행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에는 등급 하향 조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증권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경영진이 주주와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주가치 훼손 우려를 완화할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려아연 지분이 MBK와 영풍 연합에 넘어가지 않도록 금융당국이 조치를 한 과정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앞선 9월 24일 고려아연은 자사가 보유한 ‘하이니켈 전구체 가공 특허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해달라고 산업통상자원부에 신청했다. 정부는 이번달 18일 고려아연의 이차전지 전구체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인정해 향후 외국 기업에 의한 인수합병을 승인할 권한을 갖게 됐다. 사모펀드 MBK는 인수 지분 재매각을 통한 이익 실현이 핵심인데, 이번 국가핵심기술 인정으로 정부가 개입하면서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이를 두고 한 시장전문가는 “MBK와의 지분율 경쟁에서 밀린 고려아연이 애국심에 호소하며 자본시장 논리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제기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한국거래소는 “유가증권시장 공시규정에 따라 (유상증자 계획) 공시를 번복한 고려아연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 예고한다”고 공시했다.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되면 벌점과 공시위반제재금이 부과된다. 벌점이 누적될 경우 관리종목으로 지정되며, 관리종목 지정 후 유사 사례가 재발할 경우 상장폐지실질심사 대상이 될 수 있다. 고려아연은 다음달 3일까지 이의 신청을 할 수 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스트레이트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불성실공시법인 지정예고와 관련해 공식적인 회사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인 비철금속 기업이자,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작은 금조각들을 금괴로 만들어 해외로 수출했던 국민기업이 고려아연"이라며, "그동안 밸류업 우등생이나 다름없던 회사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시장에서 신뢰를 잃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