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62)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예술감독 직을 내려놓는다고 밝혔다.

정 감독은 29일 서울시향 단원과 직원들에게 '서울시향 멤버들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내, 10년간 예술감독으로 있던 서울시향을 떠나겠다고 알렸다. "나는 이제 서울시향에서 10년의 음악감독을 마치고 여러분을 떠나면서 이런 편지를 쓰게 되니 참으로 슬픈 감정을 감출 길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때마다 늘 세 가지로 답변한다고 전했다. "첫째는 '인간'이요, 둘째로는 '음악가', 셋째로는 '한국인'이라고 말한다"며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대답에 다시 질문을 던지곤 한다. 왜 '음악가'라는 대답이 '한국인'이라는 대답보다 먼저 나오느냐고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항상 똑같다. 바로 음악의 순수한 위대함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울러 "오랜 시간을 거쳐오면서 음악은 세상의 많은 것을 뛰어넘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매개체로 발전해 왔다." 며 "국가와 종교, 이념과 사상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음악이 가졌다는 신념은 50년이 넘는 음악인생 동안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음악보다 더 높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유일하게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나는 기꺼이 음악을 통해 사람을 돕고 그로 인해 인간애가 풍부한 세상을 만들어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것이 UNICEF를 통한 아동들을 돕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 서울시향의 경우처럼 전임대표에 의해 인간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인간의 존엄한 존재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한 17명의 직원들을 돕는 것이든 말이다"면서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를 겨냥했다.

서울시향 사무국 직원 17명은 지난해 12월2일 박 전 대표이사가 폭언과 성추행, 인사전횡 등을 일삼았다며 호소문을 내고 퇴진을 요구했다. 사무국 직원 일부는 박 전 대표를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억울해하면서도 박 전 대표는 사과하며 퇴진했다. 동시에 경찰에 진정서를 냈다. 호소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당사자가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내용이다.올해 8월 경찰은 박 전 대표가 혐의가 없다며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박 전 대표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남자 직원 A가 거짓말을 했다며 지난달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정 감독은 이 건에 대해 "지금 발생하고 있고, 발생했던 일들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용인되는 수준을 훨씬 넘은 박해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될 수 있는 한국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이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는데 이제 세상은 그 사람들이 개혁을 주도한 전임 사장을 내쫓기 위해 날조한 이야기라고 고소를 당해 조사를 받고, 서울시향 사무실은 습격을 받았고 이 피해자들이 수백 시간 동안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정 감독은 그러면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수 년 동안 내 보좌역이자 공연기획팀 직원인 사람은 그녀의 첫 아기를 출산한 후 몇 주도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3주라는 짧은 시간에 70시간이 넘는 조사를 차가운 경찰서 의자에 앉아 받은 후 입원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이것은 내가 여태껏 살아왔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했다. "결국에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나는 절대적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정 감독은 서울시향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2005년 예술고문으로 영입된 뒤 2006년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아 이 오케스트라를 아시아 정상급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서울시향 단원 여러분이 지난 10년 동안 이룩한 업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 업적은 전세계에서 찬사를 받아온 업적"이라며 "이 업적이 한 사람의 거짓말에 의해 무색하게 되어 가슴이 아프다. 거짓과 부패는 추문을 초래하지만 인간의 고귀함과 진실은 종국에는 승리할 것"이라고 전했다.

자신이 서울시향 단원들의 음악감독으로서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유감스럽다고 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음악보다 중요한 게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인간애다. 이 인간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여러분과 함께 음악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정 감독은 이날 오후 최흥식 서울시향 대표 의사를 만나 사퇴 의사를 전했다. 내년 재계약 여부를 떠나 지휘하기로 했던 정기공연(9회)의 포디엄에도 오르지 않기로 했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대체 지휘자를 찾아 예정대로 공연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1년 간 연장 계약한 정 감독은 이달 31일로 임기가 끝난다. 앞서 그는 지난 8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29일 재계약 건이 이사회에 상정됨에 따라 재계약에 청신호가 켜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서울시향은 재계약을 보류, 내년 1월 중순 이사회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정 감독의 업무상 횡령 의혹에 대한 경찰 수사, 부인 구모(67)씨가 서울시향 일부 직원들을 통해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도록 지시한 혐의(명예훼손)로 불구속 입건된 점 등이 재계약 유보 사유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됐다. 정 감독은 30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향의 '정명훈의 합창, 또 하나의 환희'를 끝으로 서울시향을 완전히 떠난다.

<사진=뉴시스>연주 듣는 정명훈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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