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VID’에서 ‘V’와 ‘I’가 빠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 포괄적 합의에 그친 회담, 고위급회담에서 속도 내야
| 회담의 진정한 승자, 앞으로도 맡을 역할 더 커질 것


“Kim Jong Un of North Korea, who is obviously a madman who doesn't mind starving or killing his people, will be tested like never before!”
“북한의 김정은은 자신의 인민들을 굶기고 죽이는 것에 개의치 않는 미치광이가 분명하다. 전례 없는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미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9월 22일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그는 이튿날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루서 스트레인지 공화당 후보 지원유세 도중, 김정은 위원장을 향해 “우리는 미치광이들에게 로켓을 발사하게 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UN 연설 도중 '미치광이' 발언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2017.09.22)(자료:UPI)
UN 연설 도중 '미치광이' 발언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2017.09.22)(자료:UPI)

김정은 위원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즉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성명’을 내고 “(트럼프는) 분명 정치인이 아니라 불장난을 즐기는 불망나니, 깡패임이 틀림없다. (중략) (트럼프가) 무지막지한 미치광이 나발을 불어댔다. 겁먹은 개가 더 요란스레 짖어대는 법이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제 할 소리만 하는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두 미치광이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싱가포르에서 만났다. 첫 만남과 함께 악수를 건네는 양국 정상들의 표정을 지배한 것은 어색함과 경계심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1분이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경우까지 언급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독회담과 확대회담, 오찬, 산책이 이어졌고,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싱가포르에서 열린 ‘세기의 담판’이 종료됐다. 그러나 두 미치광이와 부하들이 석 달여 기간에 걸쳐 만들어낸 공동합의문은 세상이 기대했던 결과물에 미치지 못했다. 단지 ‘세계적인 정치쇼’였을까? 아니면 세간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공동합의문에 서명하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자료:Reuters)
공동합의문에 서명하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자료:Reuters)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성과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회담의 성과를 발표한 후 곧장 에어포스원에 올랐다. 수사 가득한 그의 발표 및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드러난 회담의 성과는 대략 아래와 같다.

▲ 70년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북미관계를 설정해 양국 평화에 이바지한다.
▲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다.
▲ 한국전쟁의 전사자 유해(6,000여 구)를 발굴해 송환한다.
▲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노력한다.

이밖에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기, 한미연합훈련 축소 가능성 등도 언급했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북한 인권 문제는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이 그토록 요청했던 납치자 송환 문제도 거론되지 않았다.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일찌감치 논의되지 않을 것이라 밝힌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타고 떠날 에어차이나기와 트럼프 대통령의 에어포스원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김정은 위원장이 타고 떠날 에어차이나기와 트럼프 대통령의 에어포스원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우리를 포함, 전 세계 언론이 이번 회담에서 주목한 것은, 미국의 ‘CVID’, 즉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며(Verifiable),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핵 폐기(Dismantlement)’ 요구와 북한의 'CVIG',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체제 유지(Guarantee)’ 요구가 어느 선에서 절충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합의문에 담길 것인가였다. 비핵화 로드맵의 제시 여부도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어떤 것도 ‘완전하게(Completely)’ 제시되지 않았다. CVID는 CD, 즉 ‘완전한 비핵화’에 그쳤다.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두 가지 항목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돌이킬 수 없는’ 항목에 대한 힌트는 있다. “20% 정도 진전이 있다면 불가역적인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그것이다. 물론 이 항목 역시 합의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비핵화 로드맵(타임라인) 또한 ‘자세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담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었다. 하지만 “비핵화 시간표는 짧게 짜여질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만 있었을 뿐, 합의문에는 담기지 않았다.

이번 회담이 남긴 성과의 핵심은 CVID vs CVIG의 대결에서 CD와 CG, 즉 ‘완전한 비핵화’와 ‘완전한 체재 보장’, 이 두 가지뿐이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는 선에 그쳤을 뿐이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향후 펼쳐질 긴 여정의 시작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김정은 위원장의 승리로 끝난 북미정상회담

공동합의문에 CVID가 아닌 CD만 담긴 것에 대해 실망을 표할 그룹들이 있다. 먼저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행동에 숱한 의구심을 보내온 워싱턴의 엘리트 정가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은 분명 이번 회담을 ‘검증 과정이 결여된 채 미사여구만 가득했던 회담’, 또는 ‘알맹이 없는 말의 잔치’로 격하할 것이다. 일본과 우리나라 보수 진영도 그런 그룹에 포함된다.

이런 반응이 예상되는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선 핵폐기, 후 보상’을 북미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백악관이 그간 김정은 암살까지 공공연히 얘기해 온 터라, 핵을 먼저 폐기하고 나면 체재 보장을 담보 받을 카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방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선 핵폐기, 후 보상’ 방안과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방안은 어떤 경우에도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마이크 폼페오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두 번이나 방문해가며 조율에 나섰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결국 회담 포기를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비핵화의 당사자들(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비핵화의 당사자들(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두 정상은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형식에 구애됨 없는 두 번째 만남을 비밀리에 가졌다. 회담 후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했다.

그날 세 정상이 어떤 문제로 논의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 대통령의 중재가 통했고, 문-김 만남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포기 의사를 철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김 위원장이 더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태의 흐름 상 꽤나 설득력 있는 관측이었다.

그러나 정작 북미정상회담 뚜껑을 열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회담 후 트럼프 대통령이 한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아무것도 내려놓은 게 없다. 그래서 이번 회의는 북한에게 만큼이나 미국에게도 조건이 좋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미국이 윈윈(win-win)한 회담이라고 자평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북한은 잃은 것이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선 핵폐기’를 잃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체재 보장을 해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간 워싱턴과 판문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물밑협상의 승리자가 김정은 위원장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숙제로 남겨진 CVID와 CVIG

공동합의문에 CVID가 빠진 것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더 이상 명확하게 할 수 없다. 북미관계를 새롭게 하자고 했으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문안에 포함됐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나와 김정은 위원장은) 포괄적인 성명에 서명했다. 굉장히 많은 것을 포괄한다. 그가 이행할 것이라 믿는다. 도착하자마자 프로세스를 진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부연설명도 잊지 않았다.

비핵화 로드맵, 즉 타임라인에 대해서도 “타임라인 얘기를 들었는데, 완전한 비핵화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과학적으로도 그렇다. 절차를 거치면 재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북미고위급회담의 실무진(왼쪽부터 폼페이오 국무장관, 성김 주필리핀대사, 최선희 외무성 부상,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북미고위급회담의 실무진(왼쪽부터 폼페이오 국무장관, 성김 주필리핀대사, 최선희 외무성 부상,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스트레이트뉴스/디자인:김현숙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에어포스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했다. 약 20여분 간 이어진 통화에서, 그는 “북미 간 합의를 신속히 이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이미 밝힌 대로, 다음 주부터 폼페오 국무장관급 인사들이 북미고위급회담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북미고위급회담의 주요 의제는 김정은-트럼프 회담에서 미뤄둔 사안들이 될 것이며, 핵심 의제는 CVID 중 ‘검증 가능할 것(Verifiable)’과 ‘돌이킬 수 없을 것(Irreversible)’이 될 전망이다. 상당한 기간과 그보다 더 상당한 양측의 인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회담의 진정한 승자는?

워싱턴 엘리트 정가가 보기에, 이번 북미정상회담은 포괄적일 뿐 구체적인 사항이 없다. 물론 북미 간에 70여 년 가까이 계속돼 온 대립 관계를 청산하는 첫 출발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만큼 대단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세계사적 행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선언 형식만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미 의회의 공감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다. 북미고위급회담이 속도를 낼 것이라는 관측은 그래서 나온다.

그런데 “(나와 김정은 위원장은) 포괄적인 성명에 서명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이번 싱가포르 회담의 진정한 승자가 따로 있음을 보여준다. 그 승자는 “북미 양측이 포괄적인 부분에 대해 우선 합의를 하고, 과정은 단계적으로 천천히 진행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 방안을 중재안으로 제시했던 인물,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이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은 온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려하게 개막됐지만, 말 그대로 ‘완전한 비핵화’와 ‘완전한 체재 보장’에 대해 양 정상이 인식을 함께하는 정도의 성과만 거뒀을 뿐이다. 문 대통령의 중재안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다.

이제 단계적 이행의 로드맵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북미고위급회담이 개최될 순서다. 미국의 11월 선거 이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면 달려도 한참을 달려야 한다. 그 과정에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회담이 이어질수록 문 대통령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커질 것이다. 이래저래 북미정상회담의 진정한 승자는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문재인 대통령이다.
김태현bizli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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