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YS, 민주화운동 동지에서 정치적 앙숙으로」
「여전히 남는 회한, 만일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더라면」
「YS가 호랑이 굴로 들어갔던 이유는?」
「DJ와 YS의 통합을 이룰 적임자, 지금으로서는 단 한 사람뿐」

 

김태현

DJ와 YS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김대중 후보는 겨우 90여 만 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그때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헌법을 유린하는 시대가 펼쳐졌고, 명맥을 유지한 군사정권은 ‘80년의 봄’ 이후 거의 8년 간 수많은 국민들을 학살하며 반 민주화의 길로 치달았다.

박종철에서 이한열로, 다시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투쟁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끌고 나갈 제13대 대통령(1987.12.16)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가장 큰 관심사는 ‘대통령 직선제’였고, 선거에 나선 후보는 김대중(이하 DJ), 김영삼(이하 YS), 김종필(이하 JP), 노태우, 그리고 백기완이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했던가. 정권이 붕괴될 위기를 6・29선언으로 정면 돌파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제일 먼저 치고 나가는 가운데, 민주화운동 진영이 맞닥뜨린 도전은 DJ와 YS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였다.

민정당 총재에 취임한 노태우 후보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면서 ‘인정받기 퍼포먼스’를 펼치는 동안, 민주화운동 진영은 후보 단일화 문제를 놓고 본격적인 분열의 와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당시 유리한 쪽은 YS였다. 민주당 내 분위기가 DJ보다 더 유리한 상황에 있었고, DJ가 직선제 개헌만 된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1986.11.15)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YS는 후보 단일화 문제를 민주당의 내부문제로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선명성과 진보성, 그리고 대중연설에서 상대적으로 앞서 있던 DJ는 자신의 불출마 선언을 번복했다. 번복의 변은 ‘변화된 상황’이었고, 논거는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를 자발적으로 수용할 경우에 한해 불출마 선언이 유효한데, 그것을 거부하는 4・13호헌조치가 발표되는 순간 무효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DJ는 후보 단일화 문제를 민주당 밖으로 끌고 나가고자 했다.

그해 10월, DJ가 광주와 목포, 대전, 인천에서 지지세를 과시하는 동안, YS는 민주당의 후보 자격으로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한 후, 부산 수영만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10월 말, DJ는 대통령 출마를 위해 평화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11월 들어 JP 역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만약에...

이 시기는 2015년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망령처럼 떠돌고 있는 지역구도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시기였다. 왜냐하면 당시 각 후보들이 가장 공을 많이 들였던 선거 전략이 다름 아닌 지역주의였기 때문이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와 경북, 즉 TK지역에 의존했고, YS는 부산과 경북, 즉 PK지역에 의존했으며, DJ는 호남 지역주의에 근거해 ‘DJ가 호남과 서울에서 이길 수 있으므로 YS와 JP가 노태우 후보의 표를 분산시킨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4자 필승론’에 의존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선거에 가장 전략적으로 임한 이는 노태우 후보였다. 그는 영호남이 대립하도록 구도를 짜면 야당에 대한 지지가 분산될 것이라 확신, 마음껏 써먹을 수 있는 TV 등 친 정부 언론을 활용해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리고 그가 내건 기치는 ‘안정론’이었다.

이후 DJ가 여의도 광장과 보라매공원에 각각 130만과 150만 인파를, YS가 여의도 광장에 130만 명을 동원하며 기세를 올렸고, 노태우 후보 역시 여의도 광장에 130만 명을 동원하며 맞불을 놓았다. 만일 그 상태로 선거가 치러졌다면, 어쩌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1월 29일, 노태우 후보에게 천운과도 같은 호재가 발생했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 858편 여객기가 공중 폭파되는 참사였다. 폭파범 마유미가 선거 하루 전날인 12월 15일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이 TV에 대대적으로 방영되었고, 그것으로 노태우 후보의 ‘안정론’은 깔끔하게 완성되었다.

▲ 대통령 선거 전날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마유미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다지만, 당시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더라면, 그래서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가 그때 들어섰더라면, 절차적 민주화조차 퇴행기를 맞고 있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곤 한다.

DJ와 YS를 통합할 인물은?

내년의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둔 지금, 전직 대통령 YS가 남긴 정치적 유산의 면면을 살펴보며 대선 후보를 점쳐보는 일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실 DJ가 남긴 유산 역시 살펴야겠지만,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상대로 선거를 치를 정도로 오랜 연륜을 가졌고, 그의 뒤를 따른 정치인 중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이가 박지원 의원 정도인 터라, 예측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 아쉽다.

이쯤에서 야합이라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감행했던 ‘3당 합당’ 당시, YS가 내질렀던 일성을 되새겨보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자면, 호랑이는 전두환에 이은 노태우 정권이고, 호랑이를 잡으려는 사냥꾼은 그가 그때까지 몸담았던 진영, 즉 민주화 진영이다. 그리고 호랑이 굴은 민정당이다.

그의 일성은 청와대 입성 후 인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최형우, 김동영, 안상수, 정의화 등 많은 정치인들이 그를 거쳐 갔고 또 정치를 하고 있지만, 지금의 정치판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인사들을 분류해 보면, 그가 호랑이 굴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가 비교적 선명해진다.

노무현, 손학규, 김문수, 이재오, 홍준표,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좌측에 명기된 네 사람은 진보, 우측에 명기된 네 사람은 보수로 분류된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이른바 YS 키즈들이다.

현 시점에서, 이들 중 누가 YS가 남긴 정치적 유산의 적임자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누가 이번 대선의 적임자일까? 이미 대통령을 지낸 두 사람과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두 사람을 제외하면, 손학규 전 상임고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전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남는다.

그러나 홍준표 지사는 보수 진영 인사이니 제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YS가 키워낸 보수 진영 인사들 중 친박의 서청원, 비박의 김무성이라는 막강 실세들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때 구로구 노동운동의 신이라 불렸던 김문수 전 지사 및 민주화운동 진영의 강자였던 이재오 전 의원 역시 보수 쪽으로 갈아탔으니 제외다.

남은 이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뿐.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이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는 지금, 야당을 통틀어서 민주화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 그래서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칭하는 김무성 대표와 정치적 대부를 자칭하는 서청원 최고위원의 ‘무턱대고 오른쪽’을 상대로 ‘DJ와 YS의 통합’을 이루어낼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안철수 전 대표? 김한길 전 대표?

YS가 호랑이 굴로 들어갔던 이유는 호랑이를 죽여 버리려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YS 말기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이인제 전 후보처럼 전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생포해낼 수 있는 인물은, 지금으로서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 한 사람뿐이다.

그러려면 DJ가 그랬던 것처럼, 정계은퇴를 번복해야 한다. 과연 번복할까? 번복한다 해도 좌측으로만 달리는 사람들과 우측으로만 내빼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마르크스의 ‘대립물 통합의 법칙’이라도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년에 펼쳐질 여우 사냥에 총대를 메고 뛰어드는 무리수도 두지 않아야 한다. 이런 시나리오, 현실화될 수 있을지... 답은 물론 천심, 즉 민심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태현 두마음행복연구소 소장, 인문작가, 강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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