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은행권 혁신 시도, 제자리 걸음
카드사와 부가가치통신사업자(VAN사), 전자지급결제대행업자(PG사), 빅테크와 제도 변화까지—국내 결제 시장이 격변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우리카드의 독자망 구축, 발란 사태로 불거진 정산 갈등, 수수료를 둘러싼 이해 충돌, 정부의 종합지급결제업 도입 논의, 애플페이 확산 등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스트레이트뉴스는 「결제 전쟁」 시리즈를 통해 결제업계 판도 변화의 핵심 이슈들을 짚고, 시장 재편의 흐름을 분석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과거 금융혁신의 핵심 제도로 주목받았던 종합지급결제업 도입 논의가 사실상 멈춰선 상태다. 금융당국은 2023년까지 관련 제도화 여부를 검토하며 업계 의견을 수렴했지만, 2024년 이후에는 구체적인 정책 추진 일정이 사라졌고, 올해 들어서도 관련 법안 발의는 전무하다.
◆ 정부도 국회도 손 놓은 지급결제 혁신
8일 카드업계에 따르면, 이달 초 카드사들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과 만나 지급결제 전용계좌 허용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급결제 전용계좌란 기존에 은행만 제공할 수 있었던 고객 계좌 관리, 이체, 결제 등의 기능을 일정 요건을 충족한 비은행권에도 개방하는 제도다. 즉, 보험사·카드사 등도 자체적으로 계좌를 기반으로 한 결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해외 사례를 보면, 일본은 2023년 ‘자금결제에 관한 법률’을 통해 비은행 금융기관의 결제 서비스 제공을 허용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유럽연합(EU) 역시 PSD2 지침을 통해 계좌접근권을 제도화하며 경쟁을 촉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결제 인프라 접근성 개선을 넘어, 플랫폼 주도권과 금융데이터 경쟁력 확보와도 직결된다.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토스 등 빅테크 사업자들이 결제 시장의 주요 축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기타 비은행 금융사들이 디지털 생태계에서 단순한 ‘결제 연동 플랫폼’ 이상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종합지급결제업 같은 제도적 기반이 필수적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정부는 2020년대 초반부터 종합지급결제업 도입을 타진해왔다. 금융위원회는 2022년 ‘지급결제 제도 개편 방안’을 통해 해당 제도의 법제화 방향을 공개했고, 2023년에는 업계 의견을 수렴하며 구체적인 제도 설계에 착수했다.
당시 금융위는 “은행 중심의 폐쇄적 결제 인프라 구조를 완화하고, 경쟁과 혁신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일정한 자본 요건과 리스크 관리 체계를 갖춘 비은행 금융사에게도 결제계좌 기반 서비스 제공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2024년 이후 관련 논의는 사실상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금융위의 연례 업무보고나 중점 추진 과제 어디에서도 종합지급결제업은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국회 차원에서도 관련 법안 발의나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 비은행권 “도입 시급”..왜 멈췄나?
일각에서는 “정부가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결단을 미루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카드업계는 자체 결제망 강화와 디지털 전환을 위해 종합지급결제업 도입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보험업계 역시 장기적인 고객 기반 확장을 위해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핀테크 업계 관계자 A 씨는 “결제 인프라의 진입 장벽이 지나치게 높고, 비은행권은 언제나 은행 계좌에 종속된 구조”라며 “금융 플랫폼 주도권이 은행과 빅테크 양측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전통적인 비은행 금융사는 정책적으로도 외면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입이 지연되는 이유로는 은행권의 반발과 소비자 보호, 시스템 리스크 관리에 대한 우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종합지급결제업이 시행되면 일정 요건을 갖춘 비은행 사업자도 은행과 유사한 수준의 계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 경우 금융시장 내 책임 구조와 감독체계를 재정비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신중론’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같은 시기, 정부가 빅테크 기업의 금융업 확장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다는 지적도 있다. 네이버파이낸셜과 카카오페이는 선불전자지급업·후불결제업·금융상품 중개업 등으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으며, 토스는 이미 은행, 증권, 보험업에 직접 진출해 종합 금융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A 씨는 “핀테크·빅테크에는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 기존 금융사에게는 디지털 전환 기반을 닫아두는 것은 형평성 문제”라며 “종합지급결제업은 단순한 업권 간 이슈가 아니라, 금융산업 전반의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라고 강조했다.
◆ 비은행 금융사, 진짜 도입 의지 있나?
일각에선 종합지급결제업 도입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로 비은행 금융사의 ‘소극적 태도’를 지목한다.
지급결제업계 관계자 B 씨는 “종지업 수요가 있는 제2금융권에서조차 관련 논의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은행권의 반대 기류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고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결제 혁신 이슈가 결국 ‘플랫폼 패권’ 문제로 귀결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신재우 한신대학교 IT경영학과 교수는 “결제 패권은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규제, 제도, 감독 체계의 결정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라며 “국내 지급결제 시스템은 오랜 기간 은행 중심으로 구축되어 왔지만, 디지털금융 확산에 따라 새로운 판이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정부가 한때 혁신을 외치며 추진하던 종합지급결제업 논의는 사실상 ‘정책 블랙홀’에 빠진 상황”이라며 “도입 여부는 다시 국회와 금융당국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