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의 형평성”보다 중요한 건 “금융의 다양성”
“중금리 시장의 핵심 공급자는 더 이상 저축은행이 아니다.”
한 저축은행 임원의 자조 섞인 말이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금융당국은 ‘금융의 생산적 기능 회복’을 정책 기조로 내세우고 있다. 자금이 비효율적으로 고여 있는 곳이 아닌, 실수요자에게 흘러가도록 시스템을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자본시장에는 선순환, 시중은행에는 중소기업·서민 지원 기능을 복원하겠다는 기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실현 방식의 구조적 모순에 있다.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규제 전략은 자금의 흐름을 여는 대신, 특정 업권의 숨통을 죄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부터 단계적으로 강화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는 올해 7월, 이른바 ‘스트레스 DSR’ 3단계 체제로 전면 확대됐다. 이는 단순히 금리 인상 대비 리스크 관리를 넘어서, 모든 업권에 동일한 가산금리를 적용해 대출 가능 금액을 제한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가 저축은행과 같은 제2금융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신 기반이 약하고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반영해야 하는 업권 특성상, 중·저신용자나 소득이 불안정한 차주의 대출 접근성이 빠르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금융위원회는 저축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율을 0%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는 방향성을 수차례 언급해왔고, 이는 저축은행의 여신 확장 여력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서민 대출의 출구를 막는 규제는 정책이 표방한 ‘생산적 금융’이라는 목표와 충돌한다. 가계부채를 억제한다는 명분 아래, 상대적으로 취약한 금융 이용자 계층은 갈 곳을 잃고 있다.
비슷한 고민은 해외에서도 반복된 바 있다. 주요 선진국들도 금융 건전성 강화를 이유로 총부채상환비율(DTI)에 기반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도입했지만, 결과는 중금리 시장 위축과 비제도권 확장이었다.
예컨대 호주는 2018년부터 연소득 대비 6배 이상 대출을 제한하는 DTI 규제를 시행했다. 이로 인해 중저소득층과 첫 주택 구매자가 시중은행 대출에서 밀려났고, 규제가 느슨한 비은행권이 반사이익을 누리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다.
캐나다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도입해 모기지 대출 심사 시 실제 금리에 2%를 더한 금리를 기준으로 상환능력을 평가하게 했다. 한국의 스트레스 DSR과 유사한 제도다. 이후 대출 승인율은 급감했고, 일부 수요는 P2P나 대출 브로커 등 제도권 밖으로 이탈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영국은 고금리 소액대출을 규제하면서 중금리 대출 시장 자체가 붕괴했고, 저신용층의 자금 접근성이 급격히 축소됐다. 수십 개의 대부업체가 폐업한 자리를 사회적 금융기관이나 공공 보증 대출이 채우지 못하면서 비공식 사금융 확산이라는 2차 문제로 이어졌다.
이들 국가는 모두 한 가지 공통된 교훈을 남긴다. 규제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체 공급망’의 유무다. 규제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로 인해 제도권 내 포용 금융이 후퇴한다면, 자금은 결국 더 불안정한 영역으로 흘러가게 된다.
금융당국은 2025년도 업무계획을 통해 업권별 위험가중치·충당금 규제, 부동산 노출 규제 등 건전성 기반의 금융 리스크 관리 체계 합리화 과제를 추진 중이다. 이 과정에서 대출금리 산정 기준의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 가산금리 산정 구조의 정비 가능성도 논의 대상이지만, 현재까지 구체적인 제도 설계나 법제화 계획은 공식 발표된 바 없다.
이를 두고, 사실상 금리 규제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는 업계 우려도 존재한다. 특히 수신조달 비용이 높은 지방 중소 저축은행은 정무적 리스크까지 부담해야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예금자보호 한도가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상향되면서, 수신기반 측면에서는 저축은행에도 기회 요인이 일부 주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신 측면에서는 여전히 총량 관리와 DSR 규제가 병존하는 탓에, 수신과 대출의 균형 잡힌 성장 기반은 부재한 상태다.
더욱이 저축은행은 현행 제도상 자기자본의 150% 범위 내에서만 유가증권 투자가 가능하고, 이 중 상당 부분은 국공채 등 안전자산에 한정된다. 시중은행과 달리 수익 다변화 수단이 제한적이어서, 자산운용 측면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저축은행은 단지 이자 수익을 창출하는 금융사가 아니다. 제1금융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서민과 자영업자에게 제도권 내 마지막 금융접근성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규제의 목표가 포용적이고 생산적인 금융 질서라면, 저축은행은 이를 실현할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정책 목표가 ‘생산적 금융’이라면, 업권 간 기능 차이를 고려한 맞춤형 규제 설계가 필요하다. 디지털 인프라 지원, 정책금융과의 협업 확대, 투자 제한 완화 등의 실질적인 조치를 통해, 저축은행이 중소형, 고위험 구조를 넘어 지속가능한 포용금융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공정한 룰’이란 이름 아래 모든 업권에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 진정한 형평성은 아니다. 진짜 공정은 업권의 역할과 구조에 맞는 차별적 고려에서 출발한다. 저축은행의 기능을 외면한 금융정책은 결국, 포용금융의 진입로를 스스로 폐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포용과 균형의 가치가 금융정책에서도 진정성 있게 구현되려면, 이제는 잊혀진 저축은행의 존재 이유부터 되짚어야 할 시점이다.
[스트레이트뉴스 조성진 기자]
